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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집착과 사랑

by 大建 2015. 9. 2.

연중 제22 주간 수요일(루까 4,38-44)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고도 전한다. 이 군중은 예수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해주시는 분임을 알고 그분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유아기적인 집착의 모습이다.
이 군중은 예수님 자신, 즉 그분의 인격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기적, 치유 현상에만 매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 사랑의 현신으로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기들에게만" 사랑의 열매를 나누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집착은 "왜" 라는 말이 필요하고
사랑은 "왜" 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집착은 아낄줄 아는 것이지만
사랑은 아까움을 모르는 것이다.

집착은 희생할줄 모르고
사랑은 희생할줄 알며

집착은 계산된 행동이지만
사랑은 끝없는 자기희생이다.

집착은 기다림이 곧 고통이지만
사랑은 기다림이 곧 행복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에 나오는 "집착과 사랑의 차잇점"이다. 한 마디로 하면 집착은 자신(ego)에게, 사랑은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집착하는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지만, 사랑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그래서 성숙할 수 있도록 그들을 놓아주신다(그들을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보도록 하자. 당시의 군중들처럼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며 내곁에만 머무르시기를 원하는 집착으로서의 미성숙한, 그리고 많은 경우에 병적이기도 한 그러한 사랑을 하는지, 아니면 그분의 인격-사랑의 화신으로서의 인격에 매료되어 그분의 동반자로서 그분처럼 사랑 안에서 성숙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사랑으로 변화시켜 나아가는 성숙한 사랑을 하는지...

                                                                                                                                        (15K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