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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십일조

by 大建 2014. 10. 15.

연중 제28 주간 수요일(루가 11,42-46)

 

작년에 “십일조 헌금을 내지 않으면 교인 자격을 정지한다.”는 규정을 만들겠다는 개신교 교단이 있어 한창 세간에 논란이 되었다.
이렇게 십일조에 대해 강조하는 개신교회가 근거로서 들먹이는 신약의 구절이 바로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주님께서 직접 언급하셨으니 십일조는 오늘날도 유효한 것이라는 논지이다.

먼저 십일조의 유래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창세 14:21), 야곱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맹세하였다(창세 28:22). 신명기 안에서 십일조는 땅과 그 소출의 주인인 하느님께 감사하는 헌물로(신명 14:22-27),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민수 18:21)으로 빈곤 구제를 위한 헌물(신명 14:28-29)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본래 십일조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사제들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봉헌의 의미로서 제정된 법이었고, 그래서 사실상 조세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유다인은 밀과 포도주와 기름의 세 가지 세를 바칠 의무가 있었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들의 지나친 열심에 따라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따위 소소한 양념 향신료에까지 확대하여 그 규정을 터무니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잘한 것에까지 세금을 부과하여 오히려 서민들을 힘들게 하는 당시의 율법지도자들을 나무라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에게 지나치게 십일조만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은 그돈으로 배를 불리고, 자선을 실천하지 않고 "하나님"을 팔아 먹고 사는 일부 "먹사"들에게도 주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자신들을 포함한 부자들에게서는 증세를 하지 않고, 서민들에게서만 돈을 거둬서 나라 살림을 꾸리려고 하는, 정의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이 땅의 개, 돼지만도 못한, 정치꾼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평신도들 또한 십일조의 본래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정으로 십일조의 본래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자기 수입의 꼭 10분의 1이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을 떼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의미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의미로 교회에 봉헌을 하든지 또는 다른 사회복지 시설이나 가난구호기금 등에 기부를 하든지 할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수입이라고 해서 내 노력만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봉헌이나 기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정의를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열심한 신앙인은 누구든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는 신앙인이 있다면 개신교 모 교단처럼 그러한 이들을 쫓아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품어주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애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도 없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자세도 없이 그저 주일에만 왔소 갔소 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들은 그 교단 뿐만 아니라 이 한국 사회, 그리고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십일조도 하지 않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겉껍데기 신앙인들에게 주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실지 정말 궁금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도 모르고, 이웃과 나눌 줄도 모르고 그저 움켜쥐고만 살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불행한 사람들" 이라는 것이다!

                                                                                                                             (4M1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