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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8

by 大建 2008.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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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교회-사회적 차원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자체 안에 닫혀 있을 수는 없다. 교회와 사회에로 개방하는 행위를 항구히 지속해야 한다.  즉 “원수들”이나 “도둑들”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 벗이나 원수, 도둑이나 강도 등 모두를 친절하게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또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형제들은 영적으로 사랑을 갖고 서로 대하며 불평없이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1 회칙 7,14-15).

이렇게 프란치스꼬는, “벗”이나 “원수”의 구분없이,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친절한 영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는 형제들의 한 은둔소에 찾아와 먹을 것을 청하던 세 강도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러한 영접이 실천되었음을 재미있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다(잔 꽃송이 26).
프란치스칸 주의에서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나”와 어떤 공동체와의 관계는 단순히 형이상학적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칸주의 안에는 타인에 대한 참된 관심과 염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주의에서 타인은 이웃이나 가까운 자, 혹은 거리를 두고 있는 자로서가 아닌 참된 형제로서 받아들여지며, 프란치스꼬인의 인생 전체는 이러한 형제적 존경심 안에서 힘있게 영향력을 미치는 조정적인 실재로서 발전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그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야기하시는, 가치있는 중계자임을 알기 때문이다”[각주:1].
이미 앞서 보았듯이, 프란치스꼬는 1221년의 회칙에서 복음의 몇 귀절들을 인용하면서 가난과 비폭력의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1223년의 회칙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영적 유언, 복음적 정신이 어떻게 생활화되어야 하는지를 구체화하고 있다: “세상을 두루 다닐 때, 형제들은 말로써 논쟁을 벌이거나 다툼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와 반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온유하고 화목하며 겸양하고 양순하고 겸허해야 합니다”(3,10-14).
또한 프란치스꼬는 제1 회칙에서 사라센인들에게 가는 형제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를 규정하며 특별히 한 장(章)을 바친다. 형제들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평화의 증거자가 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는 형제들은 비신자들 가운데서 두 가지 방법으로 영적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 가지의 방법은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일입니다. 다른 방법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 할 때, 그들이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아드님을 믿도록, 또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1 회칙 16,5-7).

성 프란치스꼬의 선교 정신을 설명하면서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선교의 의미는 비신자들을 개종시키고 그리스도교 제도를 전파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범우주적 형제애의 복음을 사는(生活) 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와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애와 봉사를 생활하는 것이 복음의 단순한 교의적 수용보다 더욱 복음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이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각주:2].

이처럼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선교론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형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이 상호성, 형제애와 평화의 태도 안에서 민중들과 삶을 나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3. 범우주적 차원

성서적 계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전체를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의 업적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인식하고 살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피조물은 모두 좋다”(1디모 4,4)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인은 “사라센인들과 다른 비신자들”에게 가는 형제들에게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 존재들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의 태도를 취하기를 권한다. 이러한 존경과 복종의 정신은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는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확장되어 나타난다. 프란치스꼬는 순종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균형을 이루게끔 하는 덕이라고 찬미한다. 또한 순종이 모든 피조물과의 일치의 길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 노래를 끝맺는다.
     “거룩한 순종은 온갖 육신적이며 육적인 원의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순종은 육이 영에 순종하고 자기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육신을 제어합니다. 순종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과 야수들에게까지 복종케 하고, 그들 수중에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하늘에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이것들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덕행 인사 14-18).

성인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순종의 정신을 S. 로페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란치스꼬는 작은 자가 됨이 없이는,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종하고 그들 수중에 있지 않고는 형제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프란치스꼬의 이처럼 특색있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존경심은 봉사하는 한 가지 방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각주:3].
그러나 성인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과의 온전한 일치의 내적 풍요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태양의 노래”에서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창조하시는 선하심의 현시였다. 피조물들은 우주의 위대한 조화 안에서 하느님의 광채와 영광을 반사하며 또 인간과 함께 나눈다. 모든 존재들은 이제 관계와 일치의 가능성이 없는 단순한 사물이기를 그치고 인간의 형제와 자매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의 노래의 조망의 핵심에는 창조주 하느님의 부성(父性)이 자리잡고 있음을 그리고 그 신앙 체험의 한 가지 결정적 특징은 형제애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각주:4].
한편, 이 노래의 제일 첫 부분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태양의 노래 1-2).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자연과의 일치는 사실 심오한 자기 비움의 표현이다. “사람은 누구도 그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한”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성 프란치스꼬는 자신을 피조물들의 곁에 위치시킨다. 그들 가운데 자리하고 가장 비천한 존재들과 형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가난과 자기 비움이 평화라는 메시아적 선물을 얻기 위한 길임을 보았다. 가난을 선택하는 이는 자유를 선물로 받게 되며 피조물간의 형제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프란치스꼬가 태양의 노래에 전혀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을 것 처럼 보이는 용서와 평화의 귀절을 덧붙인 것이 조금도 이상스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인은 인간의 자기 이웃들과의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평화의 회복은 물질적인 사물들과의 형제적인 일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M. 까레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태학적 균형을 파괴하는 이기주의적인 정열과 치사스런 지배욕으로부터 해방된 프란치스꼬는 피조물들의 경이로움 앞에서 그들의 심오한 온유함과 매력이 자신을 차지하도록 내어맏겼다”[각주:5].
                                                                                                                    



IV. 맺는 말

폭력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평화를 전한 사람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오늘도, 인간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즉 온 우주와의 사이에 범우주적인 평화와 형제애를 얻을 수 있게 시도하게끔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1986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모임을 아씨시에 소집했다. 이날을 마무리하는 강론에서 교황 성하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모범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낸 오늘의 체험에 힘입어, 우리의 편견, 증오, 적대감, 경멸, 질투의 정신을 정화하기 위하여 새롭게 양심을 성찰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인류 가족의 일치에 고정된 우리의 영혼과 마음, 우리의 사상과 행동으로써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실패하고 말리라는 믿음과 우리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평화의 전도는 항상 하느님의 선물에 달려 있음을 확인하고 인정합니다”[각주:6].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를 위한 행동과 사상은 온전히 종교적이었다. 즉 프란치스꼬는 평화를 온전히 복음의 풍요로움 안에서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비천한 처지,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는 사람, 오직 자신 안에서 일치되고 평화로와진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평화란 어떤 전쟁이 없는 상태나 협상이나 토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봉사를 드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창조주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룬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의 그리고 피조물들과의 완전한 형제적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스승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복음적 삶; “가난”, “작음”, “겸손”, “단순성”, “비폭력”, “범우주적 형제애” 등의 증거는 “오늘도 평화는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J.A. Merino, Humanismo franciscano, Ed. Cristiandad(Madrid), 1982, 188; 프란치스칸 사상 안에서의 타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J.메리노, 프란치스칸 휴머니즘과 현대사상, 김현태 역, 가톨릭   대학교출판부, 1992, 192-240 참조 [본문으로]
  2. L. Boff, San Francisco de Asís: ternura y vigor, Ed. SalTerrae(Santander), 1982, 137-138; 레오나르도 보프, 정 그리고 힘, 박정미 역, 분도출판사, 1984, 152-153 참조 [본문으로]
  3. S. López, Obedienza, en: Dizionario francescano, Ed. Messaggero(Padova), 1983, 1120 [본문으로]
  4. J. Garrido, La forma de vida franciscana ayer y hoy, Ed. Franciscana Aránzazu, 1985, 105 참조 [본문으로]
  5. M. Carreira, 같은 책, 67 [본문으로]
  6. Juan Pablo II, Discurso conclusivo de la jornada mundial de oración por la paz, en: SF 45(1986), 36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