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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by 大建 2011. 8. 17.
연중 제20 주간 수요일(마테 20,1-16)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이야기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늦게 와서 조금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밭 주인은 문맥상으로 틀림없이 하느님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는님은 공정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말인가? 정의의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말인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신 분이시다”는 것이다(사도 10,34; 로마 2,11; 갈라 2,6; 에페 6,9). 우리는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요모조모 따지며  하느님에 대해서도 알량한 우리 지성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못 받는 기준을 우리가 만들어서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아니라고 단정을 지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의 양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재기가 아닐까?  우리는 미처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시각,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불러서 일거리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일거리가 없어서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일거리-우리 존재의 근거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 아닌가! 그분은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자비롭게 일거리를 선물로, 즉 무상으로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합당한 댓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후의(厚意)에 의한 선물을 거래로 바꿔버리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나 후하신 것(15)에 대해서 시기를 할 수 없다. 그러한 후의, 자비, 사랑이 그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속좁은 마음으로 타인과 이것 저것을 비교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나 후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좁은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대하고, 그분과 따지려고만 하기에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요 하느님의 정의이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 사랑을 본받아 당신께 사랑을 돌려드리고, 또 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게끔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유아적인 신앙을 넘어설 수 있다.

고전적 개념대로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줌(suum cuique tribuere)이 정의라면 우리는 먼저 창조주 하느님께 맞갖은 몫을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정의는 하느님 사랑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림이 정의라면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함이 충만한 정의라고 할 것이다.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요,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정의이다(Caritas magna, magna iustitia est; caritas perfecta, perfecta iustitia est)".  - 성 아우구스티누스(De natura et gratia 70)

                                                                                                                                                                                 (18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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