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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

완덕이란 무엇인가 1

by 大建 2008. 2. 20.

그리스도교 완덕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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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 5,48 ; 루까 6,36



I. 완덕의 개념


1. 역사상 다양한 완덕의 이해

  
완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그 각각은 각기 다른 철학적 혹은 신학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ㄱ) 아리스토텔레스는 완덕(완전성)을 인간 존재의 충만성으로 부터 정의한다. 완전이란 "그  속성상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 어떤 것" 이며, 이러한 의미는 그 최종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덕과 질서에 따른 존재와 행동양태에까지 확장된다 .
완전성의 주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법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하느님 관상으로 고려되는 인간의 최종 목적에 강조점을 두었다. 궁극적인 행복은, 그러므로, 인간이 전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상적 일치에 있어서 진보함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가 매번 더 일상적이고 완전해짐에 따라, 기도 안에서 어느 날엔가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뵙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일반적으로 수많은 영성신학 논문에 나타난 완덕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것은 계시와 복음의 자료들 보다는 인간의 완전성 자체와 이승에서나 그 충만성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것에 기초한 개념이었다.

ㄴ) 완덕에 대한 다른 태도는[각주:1]2008/02/16 - [정보, 자료] - 완벽주의자'>, 자기 존재의 안주성에 있어서, 자기 능력들의 발전에 있어서, 자기 초월능력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적 실재에 그를 합류시키는 과업과 기능들의 매번 더 정확한 수행에 있어서,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진보하는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인 발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능력들이 온전한 발전에 이를 때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매일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과업들의 완수를 통하여 명성과 응집력을 얻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완덕을 하느님의 뜻의 현시인 율법의 완수 그리고 선한 행위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은총을, 자유를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성숙시키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한 가지 가능성, 자극으로서 받아들이게 하였다.
하나의 이론 이상으로 항상 하나의 인생 해석 방법이었던 이러한 개념은 자연히 완덕을 단순한 존재의 완성과 동일시할 위험과, 은총을 하느님의 우정의 선물의 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단순히 자유의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배타적으로 해석할 엄청난 위험을 그 자체 안에 지닌다.

ㄷ) 그러나 우리는 완덕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위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부정함이 없이, 인간학적-심리학적으로나 영성 전통에 있어서 가장 건전한 관점과 부합됨을 인정해야만 한다.  완덕은 그 계시된 성격상 인간에게 "외부로부터" 즉 계시로부터 주어진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위치 변경"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어떠한 종류의 조건도 없이 자기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스스로를 내어 놓는 그만큼 완전하다. 한편, 인간의 사회 연대적인 조건들로 말미암아, 자기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무사욕 안에서 인간 관계들이 온전히 채워지는 그만큼 성숙에 도달한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위치 변경"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처신과 비슷한 인간의 행위이며, 하느님께서 사랑과 위로 안에서의 당신 통교의 선물과 함께 주시는 보다 우월한 완성에로의 행보를 가능케 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이러한 자유는 인간 존재의 비천함을 인간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선물, 어느 때엔가 그분의 구원 의지 그리고 그분의 영광과 동일시되는 하느님 자신의 완전성이라는 선물로 채운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께서 선물하시는 우정과 위로를 통하여 거기에 참여한다.                                                                              
 
                                                                           
2. 구약성서에 따른 완덕의 개념 

성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완전한 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분을 "거룩한 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완전성이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무엇", 어떤 "것"이 결핍된 인간 존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성성(聖性)의 법"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행태에 따라 하느님 자신의 본질과 모습을 받는다는 이 대담한 사상은 레위 19,2의 귀절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너희 하느님 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어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이 아니라 당신이 거룩하시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야훼는 그 정의(定義) 자체로 거룩하신 분이시며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양식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실 때 "거룩한" 즉 하느님께 "축성된" 백성으로 만드셨으니 이스라엘의 거룩함은 하느님과 그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행동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했다는 사실과 선택에서 유래하는 축성에 상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신명기의 어떤 서술들은 비슷한 방법으로 이러한 사상을 피력한다(신명 10,18,-19). 만일 하느님께서 이방인을 사랑하신다면 너희도 마찬가지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 성서시대 이후의 유다교는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자비라는 개념 안에서 구체화하면서 명백히 하고 있다. 하느님은 인정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분이라 악을 선으로 갚아주신다(미가 7,18; 출애 34,6; 시편 145,17). 그러므로 그분은 "정의롭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불리운다. 인간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때 하느님을 본받게 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루까 6,36에서 읽은 귀절이 단순히 성서적 가르침에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유다인들의 전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약성서의 표현들

베드로 전서(1,15-16)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인간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성성(聖性)의 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비슷함과 본받음의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어떤 행위에서나 거룩한 사람이 되시오." 또한 에페 4,32-5,1은, 골로 3,12-13의 말씀을 명백히 밝히면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비슷하게 우리가 서로에게 지녀야 할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주장한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성부의 아들들처럼 행동하기를 명하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즉 착하고, 자비롭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듯이 서로 용서하면서 아들들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된다. 이러한 성덕(聖德)의 내용을 우리는 루까 6,36이 마테 5,48보다 잘 보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귀절을 모두 상세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ㄱ) 마테오 5,48에 따른 완덕에로의 부르심

복음서 안에서 "완전하다"라는 형용사는 오직 두번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마테 5,48; 19,21).  한편 완덕(완전)에로의 부르심을 우리는 구약성서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신명 18,13; 창세 17,1: 1역대 28,9; 1열왕 8,61; 창세 6,9; 지혜 10,5).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부름받은 그 완전성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라는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결코 하느님을 "완전하신 분"으로 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마테오만이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며 그것도 단 한번 뿐이다. 우리가 "완전하다"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형용사들은 전체성의 개념을 표현하며, 온전한 것, 흠없는 것,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어떤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마르 10,21에서 예수께서는 그 젊은이에게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테오 19,21은 "당신이 완전해 지려고 하면" 즉 "당신에게 아무런 부족도 없게 하려면, 당신이 어떤 한계도 없게 하려면"이라고 같은 내용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테 5,48의 형식은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문장의 강조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품성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마테오는 인간에게 고유한 품성을 하느님에게 투사한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신인동성동형주의(antropomorfismo)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마테오의 해석은 하느님을 본받기 위하여 완전해지도록 초대한다. 이것은 마테오에게 있어서 관심이,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자기 형제들과 관련하여 인간에게 부과된 의무,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테오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니,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태도에 따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취하실 태도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마테 18,35).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용서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강조점이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하여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행해야 할 우리의 용서와 사랑의 의무로 약간 옮겨지고 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하게 되시오"라는 귀절에서 관심은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의 기능 안에서 신적 완전성이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테오가 신학자라기 보다는 윤리가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마테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라는 귀절에 5장의 산상수훈의 문맥 안에서 특별한 기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5,48이 원수에 대한 사랑의 지침의 결론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21절에서 시작되는 전체 반대대당의 결론이 되게 하고 있다. 이 결론의 정확한 의미는 이 문맥의 서론인 21절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귀절로부터 출발하여 찾을 수 있다. 여기 나오는 명령들에 대한 문자적이고 철저한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다. 영(靈)적인 완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적인 초월을 통하여 제자들은 율법의 차원에서 복음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고 완덕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ㄴ) 루까 6,36의 해석: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동정심 많은 분이시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말하기 위해 이러한 두 가지 형용사를 사용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정심 많은 온유"라는 매우 독특하고도 심원한 인간의 정서를 야훼께서 당신 자녀들, 특히 가장 궁핍한 이들을 위하여 보여주시는 너그러우심(출애 34,6)에 유보하였다. 그분은 "동정심 많고 자비로우시며, 은총과 충실성이 넘치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묘사의 반향을 우리는 야고보서 5,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루까 6,36에서는 존재양식, 특히 하느님의 존재양식, 그분의 신적 속성을 본받음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자비로움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에 대한 루까의 해석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에 그리고 그분께 돌려드리는 속성들에 보다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루까에 있어서 관심은 하느님의 완전성의 조망에, 하느님의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자비심에, 그리고 죄인들에 대한 너그러우심에, 요약하자면, 하느님의 태도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의 태도는 하느님의 태도에 따라서 조정되어야만 한다.
루까 6,36은 자연스럽게 원수에 대한 사랑의 지침을 결론짓는다. 루까는 27절의 하나의 권고로 시작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 이 권고는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이방인들과 세리들을 본받지 말라는 부정적인 형식으로 강조된다(3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형식으로서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초대한다. "여러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35-36절).
루까의 신학적 관심은 하느님과 그분의 감정, 그분의 일하시는 방법에 집중된다. 따라서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보는 관점이 루까복음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루까가  예수의 사상의 근본적인 관점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누구보다 잘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해뜨는 곳에서나 비오는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선하시며 자비로우심을 드러내보여 준다. 예수는 먼저 당신의 아버지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예수의 비유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행위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들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의 행위들 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들도 그 의미를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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