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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

완덕이란 무엇인가 2

by 大建 2008.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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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친교의 은총 안에서의 그리스도적 완덕의 체험

1. 영성 신학적 조망
                                                                           
성서의 주석을 충실히 따르면서 처음 4세기 동안 교회의 영적 생활은 예수의 가르침들을 따름으로써 실천적 결론들을 얻으려 힘썼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충만함을 그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구체화하였다. 인간은 그의 전존재를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외에는 다른 사랑이 없음을 증거하는 순교를 할 때 사랑의 완덕에 이를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사랑은 예수처럼 아버지의 품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었다. 당시의 교회에 있어서 완덕의 유일한 척도는 분열되지 않는 마음 또는 단순성으로 드러나는 피의 증거였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의 감도를 받아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되고 그리스도 추종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성숙의 척도는 그 동기들의 자연스러운 통합이었다.  믿는 이의 단순하고 통합된 영혼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위해 봉사를 살려는 진지한 염원 외에는 다른 흥미들이 자리잡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것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생각하는 완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나면서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순교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자주 성덕의 척도를 각 시대의 철학의 영향 아래 고정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주석학의 발전에 따라서, 복음적 관점에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루까의 해석이 가장 정확하게 예수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지니신 동정심과 자비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면서 성부를 본받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유착하게 되며, 그분과 우리와의 연결고리는 더욱 강해지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분이 거룩하신 것 처럼 우리는 거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테오의 복음에 인간의 의무에 촛점을 맞춘 성덕에 대한 해석-마테오는 이를 완덕이라고 부른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마테오의 관점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무이다. 따라서 관심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인간의 일반적인 완전성에로 옮겨진다. 마테오에 따르면 이러한 완전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동심원적 운동을 통하여 갈수록 점차 날카로워지는 하느님의 뜻을 완수함으로써 구체화된다. 복음적 메시지는 믿는 이의 삶 안에서 육화되며, 이렇게 하여 하느님 나라의 최고 정의(正義)로 변한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본받으라는 부르심은, 하느님 편에서는, 항상 당신 자신을 넘겨주기를 원하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총애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의 편에서는, 예수의 하느님을 닮으려는 삶의 일상적인 혹은 특별한 사건 안에서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자비로운 처신의 성숙의 새로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2. 성덕의 영성적 체험

인간의 이기심은 너무도 강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까지도 자기과시와 쾌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덕이라는 주제는 명백히 양립될 수 없는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연약함-의 조화; 기쁨, 자유, 하느님 품안에서의 자기포기와 같이 하느님의 위로 안에서 생활된 조화로서만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ㄱ) “완덕” 체험의 점진적 특성 욕구의 대상으로서의 완덕의 추구는 인간의 삶 안에서 점진적인 특성을 지닌다. 인간이 완덕에 대해, 특히, 은총의 주도성에 대해 지니는 개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인간은 삶의 각 발달 과정에서 같은 방법으로 완덕을 추구하지 않는다. 먼저, 영성의 길의 첫 단계에서는 흔히 자기 능력을 드러내려 하고 자신의 완덕을 과시한다. 은총을 단순히 자신의 노력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가진 이러한 태도는 아직 성숙을 요하며,  하느님과 자기 형제들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바라보는 자기 도취(narcisismo)에 빠질 커다란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일부는 성령의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는 아직 성덕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성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그분께 바치려는 욕구, 자기극복의 욕구는 전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할 영적 건강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전통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러한 사상을 계속 강조해 왔다. “하느님의 길에 있어서 진보하지 못한다면, 퇴보되기 마련이다”. (S. Bernardo, Epist 254, n.4;358,n.1; S. Gregorio Magno, Regula Pastoralis III,34.     PL.77,118; EA 1219; Alonso Rodriguez, Ejerciciio de perfección y virtudes cristianas,   Parte 1, trat. 1, c.6, Madrid, 19548, 25 참조.)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에 의해서 촉발된 이러한 욕구가 이미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자기극복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자극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이 완덕의 길에서 진보하는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ㄴ) 성덕이란 무엇이 아닌가? 당시의 “의롭다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성덕은 “완벽주의”나 선행의 실천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을 개발하고 성장시키려는 욕구나, 인생 안에서 자리잡고 그것으로 인해 인정받고 안주감을 느끼는 것과는 동일시되시 않는다. 선행의 실천 또한 성덕 자체는 아니니, 인간은 하느님과는 멀리 한 채 자신에게 지정된 것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속해 있음은, 그러므로, 단순한 완수보다는 더 깊고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친다. 성숙된 인간의 마음 만이 그 온순성과 무사욕으로 인해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게 된다. 따라서 선행들은 이론적으로는 필수적으로 성덕과 관련된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성덕이라고 할 수 없고,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성덕은 오직 하느님에 의한 것일 때만 모든 청교도주의, 자기 안주성을 초월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로 자리 잡게 하며,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내어 맏기는 순응성을 지니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응성은, 자기 완전성의 추구에서 흔히 인간에게 오는 자기 안주의 장벽을 점차로 극복하며 자기애(自己愛)의 그림자를 없애기 때문이다. 완덕에의 욕구 안에서조차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 자기 자신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는 순응성에 당신의 사랑과 당신 친교의 영광을 선사하신다면 이것이 바로 성덕에로의 길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의 길인 것이다.
                             
      ㄷ) “완덕”의 추구에 있어서의 위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있어서 통계적으로 자주 반복되는 현상이 한 가지가 있다. 성덕의 옳바른 추구에 있어서 자기 자신들의 과오에 속아, 성령의 인도에의 순종,  자기극복의 욕구를 포기하고 은총의 자비에 모든 희망을 두기를 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덕”의 추구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위기와 심원한 변화를 거친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으로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의로움에로의 이행, “의로운” 자의 청교도주의로부터 기쁘고도 신뢰하는 하느님 품 안에 자기 포기로의 이행 등.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든지, 영성생활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비천함에 하느님의 자비가 선물되도록, 자기 자신의 우상 또는 삶 안에 안주하려는 욕구라고 불릴 수 있는 자기애의 그림자를 거두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만이 성덕이란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의 인간 안에의 투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인간의 비천함은 하느님의 영광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자비심이 나타나는 하느님 경배의 정확한 위치로 변함으로써 더 이상 장애물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가져오는 것은 항상 하느님의 교육 방법이다. 하느님 자신이, 인격적으로,  그러한 변화가 완수되도록 하신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봉사하시면서, 혹은 침묵의 언어로써, 혹은 일상의 사건들로써 실현하시는 수동적 정화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조건 자체로써 받아들여지고 수용되는 비천함과 연약함이 그 인간을 인간답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 자비 안에서의 포기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성공-허영-자만”이나 그의 실패와 함께 발견되지 않고 자신의 비천함과 무사욕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함께 발견되는 그의 본래의 위치에 그를 있게 하며, 자기자신을 버리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ㄹ) 인간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와 더불어, 인간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아파하시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러하듯이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부족한 형제들의 허약함과 비천함을 아파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더불어 비롯된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와 더불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평화스럽게, 자신의 가난함이나 죄가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모습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비천한 모습 안에 당신을 넘겨주신 하느님, 그분의 영광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 안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며, 그때 비로소 미래를 현실적인 눈으로 그리고 그렇게 위대하신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때 그 희망의 근거는 결코 인간, 그의 능력이나 허약함이 아니라 당신 사랑과 은총으로 자비로움 안에서 당신을 본받도록 그를 부르시는 자비로우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존재양식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의  행위는 이러한 방법으로, 더 이상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들을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는 인간 자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홀로 영광받으실 아버지 하느님께 있음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은총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 너그러우심의 풍요함과 인간존재의 비천함, 피조물됨(被造性)이라는 두 극단을 일치시키는 친교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이기적으로 인간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비로운 거동의 영광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게끔 하려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만남은 자유로 변하며, 하느님의 은총의 행위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까지 관통하여 인간의 진실, 그의 가난함과 비천함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제 고통스럽지 않으니 인간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과 우정을 선사받았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약한 진흙덩어리이다. 그러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과 우정을 채워주시는 그릇으로 변할 수 있다.
인간 안에서의 하느님의 영광은, 자기 자신에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피조물 인간의 무능과 연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진정한 기쁨과 부르심을 느낀다. 이것이 자유요 충만함이지만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에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우정의 은총에로의 회귀(회개)인데, 그것이 어려운 것은 인간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예정된 은총의 행위의 효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며, 또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를 느끼게 해주시고 인간은 무엇이 은총에로 회개하는 것인가, 즉 자기애, 자기 능력, 완전성, 그리고 모든 집착과 자유에서조차 해방되고 삶의 안주에서 탈피하는 것임을 깨닫는 때인 영성생활의 최종단계에 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의 기쁨이며 인간의 유일한 안정판이다. 자신의 비천함 안에서 인간은 아버지의 모범을 본받아 자기 형제들에 대한 봉사와 자비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기쁘게 돌려 드린다. 하느님의 영광이 인간의 비천함을 채운다는 사실은,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위치를 찾지도 아니하며 개인적인 공덕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에 의해서만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느끼는 사랑의 우정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의 무사욕과 기쁨, 단순성 안에서 가장 완벽히 표현된다. 인간은 유약한 진흙덩어리이다. 그러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진흙덩어리는 하느님의 자비심의 그릇으로 변한다.
                                                                             
    ㅁ) 성덕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성덕은 인간 편에서의 “위치 변경”을 의미하게 되는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선물을 의미하게 된다. 하느님의 애덕의 본질 자체에 속함으로서 성덕은 자기증여이며 자기비움이고 겸손의 몸짓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은 당신의 충만함으로 피조물의 비천함을 채우신다. 그러므로 인간 성덕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함에 있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성자를 넘겨주시면서, 인간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사랑에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순종 안에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넘겨주시는 성자에게서, 당신의 사랑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까지 되돌려 드리는 방법으로 아들의 존재를 받으신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덕은  인간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넘겨주시는 성자의 행위로써 생생하게 표현되는 하느님의 사랑의 체험 안에서 구체화된다. 성덕은 인간을 위하여 예수의 행위 안에서 (당신 성자를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존재에 우리의 결합이 투영될 때만 그것이 진정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이 증명된다.
                                                                            
     ㅂ) 성덕과 인간 성덕은 인간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만 속하는 하느님의 영광을 그분에게서 박탈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덕은 높은 곳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또 인간이 하느님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선물인 것이다. 인간은 성덕은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결코 그것을 요구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이 그분 사랑의 위로 안에서 살아야 한다.
성덕은 인간의 행위로서는 매번 더욱 더 하느님 품 안에 있기 위한 점진적인 자기포기, 자기비하와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도 자기 자신의 어떤 것에도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 소유한 유일한 진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하여도 자신의 가난과 하느님께서 자신을 과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옹기장이이시며 인간 안에서 당신의 영광(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   은 하느님을 뵈옵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다; Adv. haer., 4,20,7. )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이라는 진흙을 가지고 작업하신다. 그러한 작업의 방법은 겸손(humilitas<--homo<--humus)안에 당신의 자비하신 존재가 드러나도록 진흙을 빚고 다듬고, 다시 만들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항상, 인간이라는 유약한 진흙덩어리 안에 당신 성자(聖子)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선한 것을 그리고 때때로 악한 것과 죄까지도 복구시키신다. 겸손의 단순성 안에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을 받아들임에 그 기원을 두는 평화와 기쁨의 거룩한 휴머니즘은 이러한 조망과 체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거룩한 휴머니즘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한 절대적인 상대화, 그리고 아버지의 품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 자녀의 평화와 기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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