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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작은형제회

빠도바의 성 안토니오

by 大建 2015. 6. 12.

 

안토니오는 1195년에 포트투갈의 리스본의 한 귀족 집안에서 페르난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주로 이태리의 파도바에서 지냈으며, 그의 유해도 파도바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다. 그는 15세 때에 아우구스티노수도회에 가입하였다.

 

1220년에는 모르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의 유해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되어 1221년 초에 프란치스꼬회 수도복을 입었다. 그는 이름을 안토니오로 바꿨다.

 

그는 곧 회교도들에게 크리스챤 신앙을 전하기 위하여 모로코로 출항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그가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을 때, 그는 심하게 앓게 되어, 유럽으로 되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병약한 그의 건강 상태 때문에 수도 생활이 녹록치 않았다. 최종적으로 그는 로마냐의 포를리 인근에 있는 산파올로라는 시골의 은둔처로 배속되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 악화를 고려하여 내려진 조치였다. 그곳에서 안토니오는 한 수사가 인근 동굴에 만든 독방에 은거하며 개인적으로 기도와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토니오의 재능이 오래 숨겨져 있지는 않았다. 포를리(Forli)에서 전혀 예기치 못하게 어떤 미사에서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강론을 시작하자 듣는 모든 이들이 그의 유창함과, 열정과, 해박함에 놀랐다. 그의 장상은 지체없이 그에게 여러 지방들을 다니면서 강론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안토니오의 여행은 큰 성공이었다. 당시 이태리 북부 지방에는 이단들이 많았는데, 안토니오의 강론을 들은 많은 이단들이 회개하였다. 그들은 대개 학식이 많은 이들이었는데, 안토니오의 날카롭고 해박한 논리에 설득되었다.

 

안토니오는 순회 강론자로서의 임무 외에도 프란치스꼬회 수사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임무에 임명되었다. 성 프란치스꼬 자신이 편지를 써서 이 임명을 확인하였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123161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못되어 시성되었다. 스승 성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의 주보성인임에 반해 그는 유럽의 주보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행동이 뒤 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 ( I, 226 )

                                                                                                                                                                           (50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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