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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작은형제회

영적 동반 (영적 지도)

by 大建 2008. 4. 10.

 영적, 심리적 관점에서의 동반


용어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영적 지도라는 말 보다는 “영적 동반”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성생활에 있어서 진정하고도 유일한 지도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반이란 말은 영성신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이의 영적 여정에 함께 하며
그의 영적 진보를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작은형제회 문헌에서 동반이라는 말은
“초기 양성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양성 담당자는
각 피교육자를 자신의 여정에 동반할 것이다”(141,1)라고 회헌에서 단 한 번 사용되고 있다.

영적 동반자로서의 원장
“봉사자들과 원장들은 자기들에게 위탁된 형제들과 함께 긴밀히 일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된 가정’과 같은 형제적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덕행을 닦는 데 있어서나 본 수도회의 법규와 전통을 지키는 데 있어서
형제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다”라고 회헌 45조 1항은 말하고 있다.
원장직은 단순히 수도원 운영과 행정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형제들에게 영적인 보호자, 인도자, 증거자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원장직을 수행함으로써 자기 삶 안에 사랑과 충실성의 덕을 증진시키고,
형제들의 모든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가치 앞에 민감해져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인도자로서의 원장직은,
형제들이 공동체 안에서 각자 축성된 자로서의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자기 성소에 충실하고 교회로부터 위탁된 사명을 완수하려는 형제들의 목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제들이 자신들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충실하고자 할 때,
원장은 넓은 마음, 인내심, 그리고 성령께 대한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지니고 어머니다운 마음으로(cf. 2회칙 8장),
즉 형식적이거나 흥미 위주이거나
혹은 하느님께서 형제들에게 주신 선물을 무시하는 태도나 마음이 아니라
자애로운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형제들 안에 성령의 불이 꺼져 있다면 다시 지펴주고,
“현명한 감독과 형제적 권고로 최선을 다해 악을 저지르고
넘어진 형제가 다시 서도록 그를 선 안에 굳건히 할 것이다”(회헌 252,1).
무엇보다도 자신을 심판관으로서 보다는 형제요 벗으로 드러내면서 행동할 것이다.

원장은 공동체 전체에 그 존재 목적에 맞는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영적 동반자로서 원장은 그저 현상 유지나 하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원장은 각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기도 생활, 영속적 양성, 복음적 형제애의 분위기 증진, 서원 생활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회헌 137,3).
단순한 규칙,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애덕에 기초한 수도생활의 정상성을 증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원장은 공동체에 대한 순응성, 헌신성, 각 인격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넓은 마음,
현상들을 식별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능력, 자기 자신의 한계들에 대한 인정,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기도 생활, 자기 자신의 영성 생활의 진보 등을 통하여,
명하기보다는 동반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면담 혹은 각 형제와의 개인적 관계
영적 동반에 있어서 면담은 유익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원장이나 공동체의 어떤 형제, 한 쪽에, 혹은 양쪽에 닫힌 마음이 있을 때,
이러한 관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원장의 직능이 공동체의 서로 다른 형제들의 연결 고리이어야 하고,
각 형제들이 자기의 개인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성소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있다면,
각 형제들과 주기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
논리적이고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장과 공동체의 각 형제와의 면담 혹은 대화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
면담을 통해, 서로간에 “말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두 말할 나위없이 긍정적인 것이며, 또한 치유의 수단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 수도자들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비정상성을 살아간다.
말한다는 것은 마음의 부담을 덜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특정한 행위들을 버리게 하며,
상대의 인격에 다가가게 하며, 편견을 버리게 하고, 오해를 풀어준다.
이렇게 말하고 듣는 것을 통하여,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대화를 통하여 인격체들은 새로운 판단 기준을 얻게 되고,
축적되어 온 공격성의 행위들을 버리게 되며,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고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며 어떤 행위들의 동기들에 대해 해명하고,
인격체 안에 숨어 있는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 특정한 행위나 이념들을 비난하는 경향을 버리게 되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상황에 대한 식별과 이해를 위하여 유익한 시간과 장(場)을 만나게 되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의 한계와 같은 특정한 현실들에 대해서 인식을 하게 되며,
상이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서로 나누고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
각자가 이야기하고 들을 수 있도록 흥미로운 시간을 마련하고
각 인격체의 선의를 납득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며,
각자는 스스로가 존중됨, 받아들여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의 덕분에
수도자는 공동체의 책임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개인적 면담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상호 관계의 수단이며,
더 큰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교환되는 주제보다도 전달되는 그 무엇-신뢰-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면담은 지속적으로 자주할수록 더 하게 되며,
덜 할수록 그것이 소용없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원장-형제”간의 인격적 관계는
인격체의 존재하고 생각하는 양식에 대해 최대의 존경심을 드러내 보이는
형제애 안에서 생활되는 것이다.
결코 감정이나 우월감, 지배욕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각 인격체가 자기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서 인정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존재 방법에 대해 동의하며 그것을 바꾸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동반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영적 동반 중에 지도자(원장)이 취해야 할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영적 지도자가 자기를 찾아온 형제를
이미 정해진 어떤 범주 안에 넣는 데에 신경을 쓴다면,
그를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심리학, 신학 등 학문의 위험이다.
왜냐하면, 학문들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쉬운 틀, 범주들을 제공하지만,
범주들을 넘어서는 영혼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피곤해 함이 없이 자신이 “죽도록” 들어야 한다.
자기가 죽을 때 상대방에게 생명을 전해 줄 수가 있다.
이것이 영적 동반 관계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영적 지도자에게 무조건 의탁만 하려던 형제도
영적 지도자가 그토록 주의깊게,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자기 말을 듣는 것을 볼 때,
지도자가 자기 생명을 통교하기 위해서,
보다 정확하게는 피동반자 자신이 이 생명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피동반자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앞에서 원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외적인 방법들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굴없는 지도자요 동반자로서 누가 그 안에 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스승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 방법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의 인간 조건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셨기에 그것 때문에 죽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인 것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당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셨다.
우리의 길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의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삶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이야기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탁월한 가르침이 된다..

이상적인 영적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모상이어야 한다.
형제의 영적 여정에 이정표를 만들어 줄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를 내적으로 격려하며,
조명하며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는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내하는 사람이다.
피동반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여정 전체를 통하여 신중하게, 그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면서 그와 동반한다. 
때때로 피동반자가 오류를 범하거나 표징을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경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동반자가 스스로 갈 길을 찾고, 결정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자신의 체험과 피동반자의 체험이 서로 메아리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면서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인식하도록 하셨다.
영적 지도자가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그의 체험이 심오하다고 하여도,
여전히 그 또한 하느님께로의 여정에 있다.
그리스도 역시 이 지상에서는 성부께로 나아가는 여정 안에 계셨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따랐다. 아니, 사실 그분과 함께 길을 갔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분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렇게 원장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클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제자들과 벗이 되셨다.
우정은 서로를 도와준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사부님과 성녀 클라라와의 관계도 이러한 동반의 관계, 우정의 관계였다.
서로를 도와주며, 서로를 영적으로 성숙시켜주는 관계이다. 
원장과 형제들의 여정도 이러한 우정의 동반이어야 한다.

결   론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개인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함께 걷는다.
여럿 중에 누가 조금 앞서 간다하여도, 결국 다른 이들이 따라오고,
오히려 그 다음부터는 뒤쳐질 수도 있다.
따라서, 영적 여정 안에서 우리는, 서로 함께 사는 이들의 안내자요, 동반자이다.
혼자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영적 여정은 아무리 개인적이라 할지라도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 동반자, 영적 지도자는 어디 있는가?
수도원, 형제회의 모든 형제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앙인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가 나의 영적 지도자 동반자일 수 있다.

우리가 영적 지도를 하고, 원장직을 수행하고 할 때,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그렇다. 우리가 주는 이들로부터 또한 우리가 받는 것이다.
피동반자의 영적 여정, 영적 체험에 동반하면서,
원장, 혹은 영적 지도자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내가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성으로 말미암아 건전한 우정이 발전되어 나아간다.

특별히 유교적 전통 안에서 살아온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수도자들은
직책이나 나이로부터 오는 권위 의식을 버리고 이웃을 대할 때
그들로부터 하느님의 진리, 인생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영적 여정을 모두 함께 걸어 나가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탐욕스럽게 차지하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체험을 과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사람들-형제들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이유로 여러분을 원장직에 부르셨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2고린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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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6. 작은형제회 원장회의 강의.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제17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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