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 주간 화요일(요한 5,1-16)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있다.
오래 앓는 사람을 간호한다는 것이 힘들기에 긴 병을 알고 있는 부모를 자녀들 마저도 결국은 포기하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38년이나 앓아누워 살아온 사람이다.
이미 오래전에 가족들도 나를 포기했기에, 나는 혼자서 벳자타 못 주변에서 생활을 하였고
물이 움직여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기를 쓰며 못 가까이 가보려 노력해보지만 누가 도와주지 않았기에 매번 허사였다.
처음에는 새치기하는 사람들을 원망도 하였고 다른 이들이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 하기도 하였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서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묻는다.
이렇게 누워지내는 -그것도 38년이나 꼼짝도 못하고- 사람이 건강해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별 희안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생님,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하는 소리에, 갑자기 몸에 힘이 솟아나고 팔 다리가 움직이며 그 사람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요를 걷어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나 스스로 정신없이 기뻐하는 사이에 기적을 일으키신 그분은 어느 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기쁘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나 자신의 치유를 못 미더워하는 나에게
사람들이 다가와 "안식일에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따져 묻는다.
그들은 한 인간이 38년간의 긴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그 해방의 기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 또한 유다인들의 그러한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가 이제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이 기쁨에 겨워 성전 여기 저기를 다니다가 나를 치유해 주신 그분을 만났다. 감사의 인사를 쏟아내기도 전에 그분은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라고 알쏭달쏭한 말씀만을 남기시고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셨다. 나는 그분이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라고 칭송하는 예수라는 분임을 알았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더구나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가 안식일에 나를 치유해주셨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나니, 나는 정말 유다교라는 종교가 과연 무엇인지 의문스럽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나 때문에 무죄하신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큰 슬픔에 젖어들게도 하지만,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우쳐 준다.
돌이켜 보면 그분은 나의 육신만을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삶이 무엇이신지를 알려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고 하니,
나도 이제는 안식일,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일, 사랑의 일"을 함으로써
주변의 고통받는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참 생명을 전파함으로써,
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R-1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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