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순 솔뫼 성지에서 지구 사제피정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짧은 피정이었지만 주보성인의 생가터인 성지에서 피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기도와 휴식의 시간을 지내고 올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두어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사진을 찍어둔 것이 없어서 짬짬이 카메라를 들고 나가
화각에 담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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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과 동산에 있는 김대건 성인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 1821-1846)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과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은 10세 전후인 1830년경에 솔뫼를 떠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1836년에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와 만주에서 수학을 하였다.
1845년에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9월 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김대건 신부님은 192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품에 올랐고,
1949년에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해졌으며,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솔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가문이 정착한 것은 8대 선조(守完, 1643-1725) 때부터입니다. 김 신부님 가문이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큰할아버지 종현(淙鉉, 1764-1806)과 할아버지 택현(澤鉉, 1766-1830),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한현(漢鉉, 1768-1815) 때부터입니다. 종현과 택현은 여사울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명례방(명동)의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워 1784년경 한현과 함께 입교를 하였습니다. 그후 1788년경에 김 신부님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족보명은 運祚, 1735-1814)가 입교하자 전 가족인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김진후는 신해박해(1791년) 때 솔뫼에서 잡혀 문초를 당하였으나 순교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김진후와 종현과 택현도 함께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다 김진후는 배교 의사를 밝히고 죽음을 면하고 솔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805년에 김진후는 다시 잡혀 순교를 결심하고 10년간 해미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76세로 옥사를 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아들들은 솔뫼를 떠나 종현은 전주로 한현은 안동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한편 이곳 솔뫼에 남아있던 김 신부님의 할아버지 택현은 제봉(濟鳳, 1790-1821), 제인(濟麟, 1795-1839), 제철(濟哲, 1803-1855)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 제인이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제준(濟俊)입니다. 김제준은 장홍 고씨를 아내로 맞아 1821년에 김대건 신부님을 솔뫼에서 낳았습니다. 본시 김대건 신부님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정해박해(1827년) 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나시거나 사신 분들 중에 순교가 확실한 분들은 김진후(증조부), 한현(증조부), 제준(아버지), 데레사(한현의 딸), 손연욱(데레사의 남편), 제항(증조부 회현의 아들), 제교(종증조부 귀조의 손자), 김대건 신부님, 진식·근식(숙부 제철의 아들들), 조씨(종조부 회현의 손자며느리) 등 11분이고, 그밖에도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김택현(할아버지), 희현(막내 작은 할아버지), 선식(막내 작은 아버지 제철의 아들) 등 3분입니다. 이렇게 김 신부님의 가문은 시조 66世(증조 16世)부터 69世(증조 19世)까지 4대에 걸쳐 순교하셨습니다. 이분들 중 현재까지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김제준(이냐시오)과 데레사, 그리고 대건 신부님 등 3분입니다.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 곧 송산(松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10대 선조인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하면서 가문이 내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9대 선조인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내며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이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 선조인 김수완 때부터 가문은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경 김대건 신부님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김 신부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1906년부터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님은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백 빌리버 신부님이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고,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2004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생가를 복원,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제 솔뫼성지는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대전교구가 힘을 모아 2005년에 김대건 신부님의 뜻 깊은 신앙과 성덕, 그리고 사상과 행적을 기념하고 기리 며 전하기 위하여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김 신부님의 기질과 성품에는 충청도 내포라는 지리적·문화적·사상적 특성 이 끼어 있다. 김 신부님의 서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가문의 전통과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뿌리에 대한 의식 또한 깊었다.
김대건 신부님은 수계(水系)가 발달한 내포에서 태어나 아동기를 보냈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다. 내포인들이 바다로 나가 교역하며 새로운 문물을 전하고 가져왔던 것처럼 김대건 신부님도 신학생 시절에 항해술을 배우지도 않았으면서도 바 다에 대한 투지와 의지가 남달랐다.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고 임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볼 일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기 위해 1845년 봄에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에서 작은 목선을 띄우고 서해바다 풍랑을 뚫고 중국 상해에 도착한 것이나 그해 9월에는 다시 같 은 배로 서해바다를 통하여 귀국한 것을 보면 그분의 바다를 향한 투지나 신념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에 조선을 목적지로 하는 프랑스 함대 에리곤의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도입하려 한 것이나 만주 팔가 자에서 요동벌판을 지나 장백산맥을 넘으며 입국을 시도했던 의지나 기지도 물을 다루는 내포인의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이 1846년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3개월 동안 포청에서 문초를 받으며 보여준 신진사상은 이 나라가 봉건왕조사회에서 근대민주국가사회로 넘어가야 한다는 안목을 느끼게 한다. 당시 조선은 김대건 신부님의 신진사상을 수용할 만큼 열려있거나 성숙 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분을 희생시켰으나 그 후 조선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를 맞게 된다. 김대건 신부님을 단순히 특정 종교 성직자로서만이 아니라 내포인의 기질을 간직한 그분이 지녔던 변화되어서는 안 될 것과 변화되어야 할 것에 대한 분별과 투신은 오 늘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은 그분과 내포인들, 그리고 내포에서 하느님을 믿다가 순교한 분들의 신앙과 성덕을 오늘의 우리와 후손들이 배우고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또한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은 내포의 과거 교회와 신앙과 문화에 대한 제시나 대화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조망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 기념관과 성당은 '라파엘호'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 것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수반과 같은 형상으로 설계·건립하였다.
이 기념관과 성당은 '라파엘호'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 것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수반과 같은 형상으로 설계·건립하였다.
생가터
피정집에서 내려다본 생가터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솔뫼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파가되었다. 통정대부라는 관작(官爵)을 유지하던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물고죄인이 되었다가 평민으로 강등되어 신분과 재산을 잃었다. 그 후에도 증조부는 체포되기를 반복하였고 가족들은 관졸들로부터 약취와 괴롭힘을 당하였다. 가세가 기울자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조상이 물려준 솔뫼의 토지와 가옥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조부 김택현 마저 세상을 떠나자 부친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이 10세 될 무렵인 1830년경에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였다가 경기도 용인 산중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도모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족이 솔뫼를 떠날 무렵 내포 전역은 매년 풍수해로 기근을 맞고 있었다. 이무렵 최양업 신부님 가족들처럼 고향 내포를 떠나는 이들이 많아졌다. 김대건 신부님의 솔뫼 생가는 돌보는 이 없이 폐허가 되어가다가 기근에 떠돌던 외지인들이 허물고 초가를 짓기를 몇 차례 하였다. 대지 일부를 밭으로 만들어 와편을 골라내며 경작을 하다가 정착을 하였다. 다만 그 집터가 과거에 내포에서 부유했던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지라는 사실이 내포 신자들에 의해 구전되었다. 그 같은 교회 전승과 순교자 증언록에 근거하여 1906년에 토지 매입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합덕본당 크렘프 신부님이 솔뫼에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지 확보하려했으나 정착인들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생가지 인접 논을 매입하여 훗날을 기약하였다.
1945년에 백 페랭 신부님이 솔뫼 성지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이 있는 곳 일부를 매입하여 솔뫼 성지 개발의 초석을 놓았다. 6.25사변이 끝나면서부터 합덕본당 박노열 신부님은 매년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여 오늘의 한국 성지순례 신심을 정착시켰다. 마침내 1977년 국가의 지원으로 김대건 신부님 생가지를 확보하였다. 그 후 수차례 생가복원 사업계획을 수립했으나 실천하지 못하였다. 1998년 생가지를 충청남도가 지정문화제 제146호로 지정하면서 지자체 지원과 고증을 받고 김대건 신부님 생가지에 2004년에는 생가 안채를 복원하였다.
((http://solmoe.or.k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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