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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단식으로서의 삶

by 大建 2014. 3. 7.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이사 58,1-9; 마테 9,14-15)

우리가 단식이라는 말을 하면, 흔히 "단식투쟁"이 떠오를 정도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기에는 단식이 보편적인 투쟁 방법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살을 빼기 위해서 단식을 하기도 하고, 또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단식을 하기도 한다. 그것도 많은 돈을 주고 말이다. 참 좋은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나...

그러나 사순절이나 어떤 특별한 계기가 되어 진정으로 극기하는 마음으로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단식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일지언정,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달리 수덕가가 아니셨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수덕생활을 실천하였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광야에서 수덕 생활을 하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여쭙는다. 예수님께서는 무상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단식을 거부하시면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의 제자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일러 주신다. 그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떠나고 나면 제자들이 슬퍼서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은 무엇일까?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실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바로 예수님의 삶 자체, 예수님의 삶 전체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참된 단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주님께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하신 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러한 삶, 단식으로서의 당신 삶을 이어갈 것임을 뜻하시는 것이다.

단식은 수덕 실천의 방법이 아니다! 사회의 불의한 체제와 제도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자본주의, 물신만능주의로 황폐해진 사회 안에서 가난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 즉 은총의 장이다. 나 자신의 덕을 쌓으면 그뿐이라는 바리사이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나 자신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만나고, 특별히 고통 받는 이들을 깊이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참된 의미의 단식,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단식인 것이다.

이 은총의 시기 사순절에 나는 어떤 고통받는 이들, 어떤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자. 형식적으로 몇 번 하고 마는 단식이 아니라, 단식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명심하자.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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