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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최고의 강론은 침묵?

by 大建 2009. 3. 18.

사순 제3주간 수요일(마테 5,17-19)

어떤 신부가 지난날의 그의 대부분의 강론이 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심했다.
"난 지금까지 아무 효과도 없는 강론을 하고 있었어. 더 이상 내 영혼이 거짓 맹세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사실 그 자체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는 강론하지 않겠어."
실로 절망적인 말이었다. 물론 그가 영적으로 절망했다면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 주간 그는 묵상과 기도를하면서 대부분을 보냈다.
주일 아침 미사에 그는 강론하러 독경대 앞에 섰고,
신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대로 여러해 동안 그 신부에게서 들어 왔던 종류의 강론을 들으러 앉아 있었다.
그 신부는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때서야 신자들은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신자들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강론을 시작하였다.
미사가 끝났을 때 그 신부가 발견한 그 무엇을 신자들도 찾고 있었다.

어떤 신부는 말하기를 "강론만 하지 않는다면 사제직이 참으로 편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만큼 강론은 사제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직무이다.
왜 어려울까?
하느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그 자체로서 가르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제 자신의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정도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어리숙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강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하느님의 율법도 넓은 의미에서 가르침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사실을 간과했다.

강론 때 복음에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과 청중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면,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결국 죽은 문자만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사제도 인간이고, 부족한 존재라 그 모든 내용을 다 살지 못하니,
겸손되이 침묵하는 것이 때로는 더 훌륭한 강론이 될 수 밖에...

오늘 복음은 그래서 복음을 살지 못하고 떠들기만 하는 나를 비롯하여
열심하지 못한 사제들의 가슴을 후려친다.
                                                                                                              (9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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