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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살아계신 아버지, 죽은 아들

by 大建 2009. 3. 14.

사순 제2 주간 토요일(루까 15, 1-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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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리 사랑이 치사랑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해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못미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그토록 항상 큰 내리 사랑일지라도
주님의 비유 말씀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에 비길만한 자녀 사랑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둘로 나누어 한 몫을 달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아버지가 죽은 셈 치겠다는 말이요,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치 않겠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말이 그렇지 않은가!
속된 표현을 쓰자면, 정말로 "후레자식"인 것이다.
결국 이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곁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버지 곁을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들이 자기 곁에 없으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요,
따라서 다시 돌아와 생명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며 작은 아들을 기다린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루까 15,24).

한편 큰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같이 살기는 하지만 매일 "종처럼 일하며 사는 삶"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으니
결국 작은 아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죽은 목숨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이 두 아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그분을 떠나 죄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죽은 존재이다.
실제적으로 하느님 없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느님을 떠나 살아간다고 하여도 이미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이 없이 "굶어 죽는" 비참한 삶인 것이다(루까 15,17). 
또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두려움 때문에, 혹은 의무감 때문에 마지 못해서 성사 생활을 하고 있다면,
복음의 큰 아들 처럼 스스로 "종노릇"하며 사는 것이요, 이것도 참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회개의 문제는 단순히 몇 가지 악습, 죄를 끊어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곁에서" 삶으로써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신명 30,15-16).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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