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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행

프사모 성지순례 2 - Lisboa(리스보아)

by 大建 2010.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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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목)
포르투갈 리스보아에서 첫 밤을 지낸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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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주강가의 활기찬 도시, 리스보아


역사적으로 보면, 이 도시는 BC 12세기에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했고, 그후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 족, 이슬람 교도 등이 번갈아 이 도시를 장악하고 지배했다. 그 뒤 알폰소 3세가 국토회복을 완료하고, 1243년 리스보아를 수도로 정한 뒤 대항해시대의 포르트갈 전성기가 이 리스보아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15세기 중엽부터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리스보아는 대도시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755년 리스보아 대지진으로 인하여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버렸는데 당시의 참상은 바이로알투의 교회를 가면 볼 수 있다.
그 후 폼발 후작의 힘으로 부흥을 도모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한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현재의 리스보아는 지진에서 살아남은 구시가지와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가 공존하는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도시이다. 국토를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테주 강의 대서양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리스보아의 인구는 2,062,200명이다. 
영어식 명칭은 Lisbon 이고, 현지에서는 Lisboa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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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인 Playa Mar 호텔

첫 목적지인 성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으로 향하기 전, 리스보아의 유명한 유적이라고 하는 벨렘탑을 먼저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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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렘 탑(Torre de Belem)은 발견기념비에서 테주 강 하류 쪽으로 1km 거리에 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이 탑은 당초 물속에 세워졌으나, 테주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1515~19년에 건설된 이 탑은 하얀 나비가 물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3층 구조이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서 있다. 1층은 에스빠냐가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에스빠냐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들,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만조 때에는 물이 들어오고 간조 때에는 물이 빠지는 이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1983년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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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했다고 하는 비행기. 벨렘탑 옆에 있다.


리스보아 시가지. 가뜩이나 좁은 차도에 전차길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전차는 저렇게 작은 차량이 많다



성 예로니모수도원은 지금은 수도자들이 없어서 수도회가 폐쇄된 상태로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성당은 교구 소속 상당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성소의 부족으로 수도회를 폐쇄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성소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1983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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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예로니모 수도원을 둘러본 후 우리는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의 생가터로 향했다.
사실 이곳 포르투갈에서는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라고 하지 않고 "리스보아의 성 안또니오"라고 한다.
그는 이곳 리스보아 태생인 것이다.

성 안또니오(Antonio)는 포루투갈의 리스보아(Lisboa)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 연도가 확실치는 않지만, 대개 1190년 초로 보고 있다. 그는 에스빠냐에서 1206년경 성 아우구스띠노회에 입회하였다. 1220년 모로코(Moroco)에서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 5명이 순교를 하였고, 그들의 운구차가 통과할 때에, 안또니오는 이를 보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를 곧 실행에 옮겼다. 그가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기 전에 서품을 받았는지, 아니면 입회한 후에 받았는지를 확실치가 않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였고, 프란치스꼬로부터 임명받은 형제회의 첫 신학 강의자 였다. 그는 1231년 6월 13일에 빠도바에서 사망하였고, 1232년 5월 30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시성되었다. 그리고 1946년에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박사 칭호를 얻었다(첼라노, 제1 생애 각주 163).

안또니오가 리스보아 출신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생가터가 있는지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 갑자기 방문하게 된 것이다. 순례 일정을 짤 때 왜 생각을 못했는지 정말 부끄럽기만 하다.
어쟀거나 우리는 성인의 생가터로 향했고 그곳에서 예정에 없던 미사를 봉헌하였다.

생가터에 세워진 성당과 안토니오 성인상

생가의 흔적은 성당 지하에 이렇게 형식적으로 보존해 놓았다


순례단원 중 많은 이들이 재속프란치스꼬회원들이고
그처럼 정겨운 제1회 성인의 생가터에서 미사없이 지나갈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아
예정에 없던 미사를 봉헌하고 우리는 원래의 목적지인 파티마로 향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도신부보다 열심한 순례단원들의 열성에 하느님께서도 강복하시어 뜻하지 않은
축복을 베푸셨음에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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