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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행

이탈리아 성지순례 6 - 아씨시 1

by 大建 2008. 2. 21.

드디어 아씨시에 도착했다.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아씨시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숙소인 Suore Francescane Angeline 까지는 거리가 제법되기에 용달 택시(?) 를 불러 짐을 모두 싣고 걸어 올라가고 나는 택시를 타고 간다.

주님공현대축일 전야이기에 거리가 무척이나 복잡한 줄 알았더니 택시 운전사 말로는 Manifestazio(시위) 때문이란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씨시의 야경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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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글라라 성당 앞 광장에서 내려다 본 야경. 왼편에 보이는 종탑있는 건물이 성 프란치스꼬대성당이다.

시위가 끝날 무렵이었는지 시청 앞 광장은 시끄럽기는 하였으나 조금씩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꼬의 고향에서도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 씁쓸하였다.

밤 늦게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 바오로 형제가 아씨시에서의 안내를 위해 도착하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숙소에서 잠을 깨어 창문을 여니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과 멀리 뽀르찌운꼴라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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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씨시는 여러 번 다녀갔지만 매번 움브리아 평원의 아름다움은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마음을 충만케 해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미사가 예약되어 있는 뽀르찌운꼴라를 향해 내려간다.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장 사랑했던 곳이다. 이 곳은 작은형제회가 태동한 못자리이며, 초기 동료들과 작은형제회의 삶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초기 첫 동료들은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 움막에서 머물렀다. 이 곳은 사부님이 초기 형제들을 둘씩 짝 지워 복음을 전파하신 곳이고,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곳이다. 또 이 곳에서 2회가 탄생했다. 1212년 3월 18일 성녀 글라라가 프란치스코 앞에서 머리를 자르고 착복식을 했고 글라라의 동생도 여기서 착복식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Porziuncula)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는 세상의 다른 어떠한 곳보다 이곳을 좋아했다. 그가 매우 작은 방법으로 종교적 생활을 시작한 곳도 바로 여기였으며, 그토록 뛰어난 발전을 이룬 곳도 여기였으며, 그가 행복하게 생을 마친 곳도 여기였다”(대전기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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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1209년에 산 다미아노를 완전히 재건하고 난 후 이 분도회 경당을 수리했다. 성지는 많이 변했지만 경당 내부는 프란치스코 시대 이후 손댄 적이 없다. 전면부는 후에 모자이크로 채색되었지만 옆면과 뒷면은 아마도 포르치운쿨라 경당이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해줄 것이다.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이라고 부르는 포르치운쿨라는 초기 전기들이 ‘작은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작은 포르치운클라 경당은 웅장한 대성당으로 감싸여 있다. 이 작은 경당은 10세기 이후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료들은 작은 규모의 ‘포르치운쿨라의 성모 마리아‘로 확인하고 있으며, 경당 부근을 에워싸고 있던 숲을 ’포르치운쿨라의 떡갈나무 숲‘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성당은 1160년부터 ‘포르치운쿨라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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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을 덮고 있는 대성당은 1569년에 비오 5세 교황의 교령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8월 2일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일에 오는 순례자들의 무리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1832년의 지진으로 교회가 큰 손상을 입었으나 포르치운쿨라는 손상이 없었다. 1966-1970년에 프란치스코 시대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건물과 기도 방들로 여겨지는 새로운 초석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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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 미사는 고 바오로 형제가 주례하기로 하였다.
복음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고 바오로 형제는 작음의 신비에 맛들이도록 힘쓰자는 요지의 강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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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 체칠리아 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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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경당


그리스도의 수난을 회상하고,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면서 길거리를 한숨과 눈물로 채웠던 사부님을 회상하기 위하여 마련된 곳이다. 경당 안의 방은 아주 작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눈물을 흘리는 그림이 제대 위에 위치해 있어 사부님의 수난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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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to 경당에 걸려 있는 그림

그는 이 자리에서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 알몸으로 당바닥에 누운 채 요한복음의 수난기를 듣고 시편 142편을 노래하면서 자매인 죽음을 맞았다.(2 첼라노 21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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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내 성물판매소 옆에 마련된 대형 목각 구유


정리하자면 뽀르찌운꼴라는

1.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성소를 깨달았다. 여기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경당
   주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2. 프란치스코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 때문에 이 경당을 사랑했다.
3. 1212년 3월 28일,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활양식에로 글라라를 받아들였다.
4. 1216년에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환시를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전대사를 받았으며, 이를
  호노리오 3세 교황께서 인준해 주셨다.
5. 이 경당 주위에서 총회가 개최되었다(2첼라노 57).
6.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가 여기서 식사를 함께 하였다(잔꽃송이 15).
7.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여기서 죽었다.

하느님의 사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회개 여정은 이 뽀르찌운꼴라에서 시작되었고 여기서 끝을 맺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평화의 사도인 성인을 본받아 새롭게 복음적으로 살아가보겠다는 다짐을 해보지만 어느 순간엔가 무너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지만 성인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 이제 다시 회개생활을 시작합시다"라는 말에 위안을 얻어 다시 한 번 시작해보기로 다짐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모든 프란치스칸의 영원한 성소(聖所) 뽀르찌운꼴라를 떠나 아씨시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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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지운꼴라에서 바라 본 아씨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