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여행

이탈리아 성지순례 7 - 아씨시 2

by 大建 2008. 2. 22.

아씨시는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주라는 작은산이 많이 있는 지방에 있는 마을로써 수바시오산의 경사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한 후 본격적으로 아씨시의 골목길을 누비며 순방에 나섰다.

이 작은 도시의 매혹적이고 바람이는 길들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프란치스코 시대로 되돌아 가도록 이끌어 준다. 이 길들은 프란치스코의 청년기와 회개의 역사를 되새기게 해 준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뛰어놀았고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성 다미아노 성당을 보수하기 위하여 돌과 빵과 기름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먼저 우리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성녀글라라대성당을 찾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은 도시의 매혹적이고 바람이는 길들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프란치스코 시대로 되돌아 가도록 이끌어 준다. 이 길들은 프란치스코의 청년기와 회개의 역사를 되새기게 해 준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뛰어놀았고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성 다미아노 성당을 보수하기 위하여 돌과 빵과 기름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먼저 우리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성녀글라라대성당을 찾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녀 글라라 대성당은 네 가지 이유로 성 프란치스코와 밀접한 곳이다. 1190년경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라틴어를 배웠고, 프란치스코가 설교한 장소이며, 성인의 유해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지기 전인 1226년부터 1230년까지 안치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1228년에 그레고리오 9세가 프란치스코의 시성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성녀 글라라 대성당에는 현재 다미아노의 십자가가 보존되어 있다.

지하에 자리한 성녀 글라라 무덤에는 성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850년 성녀 글라라의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 발굴되었고, 1872년에는 성녀의 상하지 않은 시신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1893년에는 성녀의 옷들과 함께 글라라 회칙의 원본을 찾아내었고, 1988년 성녀의 얼굴과 손이 밀랍으로 봉해진 뒤 좀 더 소박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유물보관소에서는 성녀의 금발의 머리카락, 레오 형제의 주석이 쓰인 사부님의 성무일도, 투니카, 성녀가 만든 긴 옷 등을 볼 수가 있다.

성녀 글라라 대성당의 광장은 성 죠르죠 광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가 프란치스코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까 마죠레에서 바라본 성녀 글라라 대성당


 움브리아 평원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이탈리아인들은 움브리아를 ‘이탈리아의 녹색 심장’이라 부른다.
산 다미아노는 움브리아 평야와 뽀르지운꼴라쪽으로 내려가는 아씨시 성 외곽 언덕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01

프란치스코는 1205년에 이 허물어져가는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고, 그로부터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206년경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동료 몇이서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에게 봉헌되었던 이 황폐한 성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쌓아 올린 곳이어서 사부님의 손길을 더욱 느낄 수 있다. 사부님이 성당 안에 돈주머니를 내던졌던 곳, 또한 1224년 사부님이 질병으로 이곳에 머무르셨을 때 ‘태양의 찬가’를 지으신 곳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212년에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와 첫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왔고 그들의 수도원이 되었다. 글라라는 이 성당에서 1253년에 죽었고 그의 자매들도 1260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새로 성녀 글라라에게 봉헌된 성당과 수도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성당  뒤쪽 중앙에 열린 공간은 당시에는 쇠창살로 막혀 있어서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이 성체를 모셨다고 한다. 내부에는 식당이 있는데, 긴 의자와 식탁은 그 당시에 사용했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1228년 글라라가 그레고리오 9세의 권유로 빵을 축복하자 모든 빵에 십자가가 새겨진 빵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위층에 올라가 돌아서서 창 밖을 내려다보니 수도원 특유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사각형 정원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당 전면으로 난 조그만 창으로 자매들이 사부님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이 곳은 글라라 성녀와 초기 자매들이 살았던 곳이고, 1240년 수녀원 회랑에까지 쳐들어온 사라센 인들로부터 자매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체를 높이 쳐들어 그들을 물리쳤던 용감한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드러냈던 곳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녀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또는 “숨은 꽃”으로 불리기도 하며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뛰어난 제자요 성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영적인 딸이었다.

성녀 글라라는 29년간의 긴 병상 생활 끝에 1253년 8월 11일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가난의 특전”에 대한 회칙 인준을 위해 교황과 맞서 끝내는 인준 받은 회칙을 가슴에 안고 돌아가신 분, 불안정한 삶의 양식을 선택하며 하느님의 섭리대로 살겠다던 성녀의 가난에 대한 갈망이 있는 곳이다.

프란치스꼬와 글라라의 성소의 못자리였던 성 다미아노 성당의 거룩함에 취한 채로 언덕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아씨시 특유의 골목길을 휘돌아 성 루피노 주교좌 성당에 도착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란치스코는 이 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나중에 산 루피노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였다(대전기 4,4). 그는 토요일에 와서 기도하곤 했던 제의실 옆 작은 방에 머물면서 주일 전례를 준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기도 하였다(대전기 6,2).

성녀 글라라는 1193년 또는 1194년 이 성당과 붙어 있는 왼쪽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불규칙한 형태의 것으로 여러 세기를 거치며 많은 손질이 가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곳에서 나는 일행과 헤어져 황 베로니카 수녀를 기다리고
일행은 로까 마죠레(Rocca Maggiore)로 향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주 오래 전 부터 아씨시의 수바시오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던 이 성은 1198년 자치를 위하여 봉기한 아씨시의 주민들에 의해 무너지고2008/02/21 - [믿음 희망 사랑/프란치스꼬]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1'> 도시의 성벽이 강화되었다.

16세로 성년에 접어들었던 프란치스꼬도 이 때 시민활동에 참여하여 건축 기술을 익혔고, 후에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하는데 그 기술을 활용하였다.
우리는 일상의 체험과 지식을 어떻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랜 영적 벗 황 수녀와의 재회의 기쁨을 뒤로하고 나는 숙소로 돌아와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식후에는 아씨시에서 추억을 만들고 성물도 구입할 수 있도록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사진 >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성지순례 8 - 아씨시 3  (0) 2008.02.23
영국  (0) 2008.02.23
이탈리아 성지순례 6 - 아씨시 1  (0) 2008.02.21
이탈리아 성지순례 5 - 아씨시 가는 길  (0) 2008.02.20
이탈리아 성지 순례 4 - 라베르나  (0) 2008.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