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여행

이탈리아 성지순례 8 - 아씨시 3

by 大建 2008. 2. 23.

이전 글 - 2008/02/22 - [사진/여행] - 이탈리아 성지순례 7 - 아씨시 2

다음 날 이른 아침 식사 후 미사가 예약되어 있는 프란치스꼬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날은 지하에 있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무덤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아씨시에 여러번 왔지만 사부님의 무덤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는 처음이다.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에 임하게 된다.

오늘 미사 역시 고 바오로 형제가 주례하였다.

복음: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사 후 잠시 참배를 한 후 고 바오로 형제로 부터 대성당에 관한 상세한 안내를 받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228년 7월 17일 프란치스코의 시성식이 지난 며칠 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현재의 대성당(바실리카)의 초석을 놓았다. 프란치스코의 유해 이전은 1230년 5월 25일에 있었다. 바실리카 외부는 건축된 이래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아씨시에서 주요 성지로 일컬어질 만큼 웅장하다. 1층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2층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공사 시작 22개월 만인 1230년에 1층 성당은 중앙통로만 있고, 제단 3m 아래에 성인의 유해를 안치했다. 1236년에 위층 성당의 지붕이 덮여졌고, 1239년에 종각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의 무덤과 예술가들의 조각과 그림으로 꽉 차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오른쪽에는 성서적인 영감을 받은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옷을 벗기우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내리우시고 묻히신 모습, 엠마오로 가는 길 등.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장면들이었고, 왼쪽의 그림들은 재물 포기,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새들에게 설교, 오상, 장례식 등 주로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생애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1250-1650년까지 4세기에 걸쳐 이태리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렸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오또(Giotto) 화풍의 어느 작가가 아래쪽 성당 내부의 그림을 그렸 다. 제대 윗쪽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정결, 순종, 그리고 승리를 본뜬 같은 계열의 작품이 있다. 성인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치마부에 (Cimabue)의 성 프란치스코 성화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수차에 걸친 작업 끝에 1818년 1월 발굴에 성공했다. 시신은 600년 전 엘리아 형제가 감춘 세 개의 무거운 석회암 밑에 안장되어 있었다. 1230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시신의 이장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벽 속에 준비한 묘에 통하는 비밀 통로를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무덤 주위에는 안젤로, 맛세오, 레오, 루피노 등 초기의 네 동료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성인의 무덤 맞은편에는 야고바 부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엄숙하면서도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유물보관소에는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회칙, 프란치스코를 위하여 글라라가 만든 털신발, 마지막 병 중에 사용하신 종이, 임종시의 의복, 야꼬바 부인이 만든 자수, 레오 형제에게 주신 프란치스꼬의 친필 강복, 에집트의 술탄으로부터 받은 상아뿔, 성 안또니오의 팔 등 희귀한 유물들이 있다.

이해되지 않는 당시의 성인 유해 도난 사건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숨겨져온 프란치스꼬의 무덤이  

오랜 세월 후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지만, 프란치스꼬의 정신만은 세기를 통하여 여기 아씨시를 비롯해서 세상 곳곳에서 빛을 발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정신을 우리 가슴속에 비밀히 간직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 온 세상에 드러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마테 10,26)

성인이 묻혀 있는 성당에서 복음의 생활화, 생활의 복음화를 다짐하고 우리는  아씨시의 돌아보지 못한 부분을 섭렵하기 위해서 다시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먼저 우리는 12세기까지 아씨시의 주교좌 성당 역할을 했던 산타마리아 마죠레(성 마리아 대성당)로 향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1216년에 자신의 손으로 건물을 보수하는데 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따 마리아 마죠레 옆에는 주교관저가 있는데 완전히 새로 재건한 것이다. 많은 중요한 일들이 여기서 일어났다. -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와 결별한 사건이다. 프란치스코는 1226년 죽기 전에 포르치운쿨라로 옮겨지기 전에 며칠간 여기서 머물렀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에 프란치스꼬의 집이라고 알려진 곳에 지은 키에사 누오바(새 성당)과 집터를 방문한 후 현재 많은 학자들이 더 신빙성 있는 생가터로 주장하고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키에사 누오바 옆에 있는 아버지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와 어머니 삐카부인 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 생가터에서 고 바오로 신부의 설명을 듣는 순례단원들

이밖에도 우리는 성인의 첫 동료였던 뀐다발레의 베르나르도의 집과 삐까부인이 성인을 낳았던 구유가 있던 곳이라는 프란체스꾸쵸를 방문하였다.

아씨시의 그 어느 곳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숨결이 배어있지 않으랴!  그러나 우리는 전승과 사실, 과거와 현대가 얽혀져 있는 이곳에서 중세에 살았던 성인에 대한 환상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의 정신을 재현해 내어야 함을 깨달으며, 아쉬운 마음만을 남겨 놓은 채로 아씨시를 떠나야  했다.

우리는 아씨시의 일정 동안 세세하게 그리고 감명깊게 성인의 역사와 정신을 설명해 준 고 바오로 신부에게 감사를 표하고 아씨시 역에 내려놓고 작별을 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바오로 형제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는 잠시 황 베로니카 수녀의 수녀원에 들러 부탁받은 물건들을 받고 석별의 정을 나눈 후에 버스에 올랐다.

이제 버스는 리에띠 계곡을 향해 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