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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축일

by 大建 2008. 10. 4.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축일

마테 11,25-30                                       

형제 자매 여러분, 단순하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꼬가 누렸던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사부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대축일입니다.


성인께서는 1182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에 있는 아씨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포목상인이었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와 어머니 삐까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며 살아가던 한 청년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세상과 교회가 변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하였고, 또 무엇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기에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불교도, 심지어는 이슬람교도들까지도 그를 존경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성인의 일생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 덕분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던 프란치스꼬는 기사가 되려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1205년(23세) 교황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 참여하려고 가던 중 스뽈레또라는 곳에서 환시 중에 “프란치스꼬야, 너는 종을 섬기기를 원하느냐? 주인을 섬기기를 원하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로 아씨시에 돌아 와, 회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씨시 교외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바로 제 뒤에 있는 저 모습과 똑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프란치스꼬야, 보다시피 다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하는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그때부터 다니면서, 성당을 고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한편 이 때쯤, 예전에는 가까이 가기에도 두려워했던 나환자 한 명을 길에서 만나고, 그 나병환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환자와 깊이 포옹하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1205년).
이렇게 자신에게 다가 오시는 그리스도를 여러 번 체험한 후, 아씨시의 주교 앞에서 자신의 옷을 다 벗어주면서 아버지와 결정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1206년,24세) 이제 적극적으로 복음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208(26세)년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미사 중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의 복음,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 복음을 선포하여라, 평화의 인사를 전하라” 하는 내용의 복음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이 것이 바로 내가 찾던 생활 방식이다” 하고는 그 때부터 복음의 내용대로 사는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차츰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여러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수도회가 설립이 됩니다.
특히 1212년(30세) 귀족 출신이었던 글라라가 사순절에 한 프란치스꼬의 설교를 듣고 가출하여 성인의 지도로 회개 생활을 시작하여 글라라 수녀회가 시작됩니다.
1219년 9월(37세)에 프란치스꼬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던 에집트 다미에따로 가서 술탄을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적장이었던 술탄은 프란치스꼬의 인품에 감동하여 그를 무사히 돌려보내 줍니다. 그리고 1220년(38세)에는 술탄의 허락을 받아 성지를 순례하고 선교 여행을 합니다. 이 때부터 작은형제회가 성지에 자리잡게 됩니다.
1221년(39세) 세속에서 성인의 정신을 본받아 복음적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재속형제회를 창설합니다. 그 첫 회원은 시에나의 루케치오와 보나도나 부부였습니다.
1223년(41세) 프란치스꼬는 그레치오에서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모습으로 구유를 꾸미고 성대하게 성탄절을 지냅니다. 오늘날 우리가 꾸미는 성탄 구유는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1224년(42세) 9월 라베르나 산에서 은둔하며 피정을 하던 중에 오상이라는 크나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사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여 성 다미아노 성당의 글라라 수녀원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쓰게 됩니다. 결국 1226년 10월 3일(44세) 해질녘에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고 지상에서의 순례 생활을 마감하면서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께서는 프란치스꼬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은 문자 그대로 복음적 삶, 즉 복음을 그대로 따르고 복음이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성인을 일컬어 “제2의 그리스도”라 일컫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라는 호칭 이외에도 “아씨시의 가난뱅이”, “평화의 사도”, “그리스도의 어릿광대”, “환경보호의 주보성인” 등의 호칭이 그분의 정신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그러나 “가난”, “평화”, “기쁨”, “자연 사랑” 등은 모두 십자가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분의 복음적 삶의 한 측면들일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본질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정도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가난하게 사셨기에 그토록 가난을 열심히 살아가셨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하느님과의 화해, 즉 평화라는 은총임을 깨달았기에 가는 곳마다 평화를 전하고자 애썼으며,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사는 사람은 항상 기쁨 속에 머문다는 것을 어릿광대와 같은 단순한 자세로서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 즉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살아간다는 것을 어렵고 무거운 짐처럼만 여기지만, 성인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도 그러한 평화. 그러한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처럼 좋으신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복음의 빛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묵상하며,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권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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