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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싸쑤에서 피정을 겸한 편안한 휴식을 취한 다음 날 (2/3, 수) 아침
우리는 식사를 하고 바로 바스크가 배출한 걸출한 성인 이냐시오의 고향 로욜라로 향하였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an Ignacio de Loyola)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Guipuzcoa)에 있는 오래된 로욜라 성에서 부유한 귀족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506년 카스티야 왕국의 재무관인 친척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시종, 1517년 나헤라의 공작이며 나바레의 부왕(副王)인 다른 친척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를 섬기는 기사가 되었는데, 라라는 그에게 군사 및 외교 임무를 맡겼다.
1521년 5월 20일 프랑스군에 맞서 팜플로나 요새를 방어하던 중 포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에 심한 골절상, 왼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 사건을 끝으로 그의 생애 제1기는 마감된다. 〈자서전 1 Autobiography 1〉에서 당시의 자신은 "명성을 얻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군사훈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세상의 허영에 빠진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생애 초기의 그는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았는데 호색적이라기보다는 거만한 사람이었다.
성자다운 삶으로의 전환은 그의 생애 2번째 시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의 삶은 1기의 삶보다 잘 알려져 있다. 팜플로나에서 다친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은 뒤 1521년 6월에 로욜라 성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한동안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처음 탈골을 바로잡을 때 저지른 실수를 고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은 뒤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그는 로욜라 성에 있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으며, 책을 읽지 않을 때는 과거에 읽었던 전쟁이야기를 회상하거나 아름다운 옛 애인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시기의 처음에는 성인전에 관심을 쏟았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신성한 기사도라고 생각한 시토 수도회의 수사 한 사람이 쓴 여러 성인들에 대한 소개가 성인전에 실려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인생관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 성인의 거룩한 금욕생활을 본받기로 결심했다.
1522년 2월 가족을 떠나, 스페인 북동쪽에 있는 순례지 몬트세라트로 가서 참회용 베옷을 입고 야망을 포기한다는 표시로 성모 마리아 상 옆에 그가 늘 차고 다니던 장검과 단검을 걸어놓고 사흘간 죄를 고백했으며, 3월 24일에는 밤을 지새면서 기도했다. 다음날 바르셀로나에서 48㎞ 떨어진 만레사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에서 지낸 1522년 3월 25일부터 1523년 2월 중순까지의 기간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거지처럼 살았다. 음식을 구걸하여 조금만 먹고 마시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고 한동안 머리를 매만지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손톱도 깎지 않았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하루에 7시간씩 기도했는데, 종종 만레사 외곽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기도했다.
만레사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영적인 시련, 기쁨, 내적인 빛을 얻었다. 만레사에서 "영성수련 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파리에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1535) 틈틈이 그 책을 보완했다. 이 책은 생생하고 역동적인 영성 체계를 담은 영적 무장에 관한 지침서로서 다른 사람들, 특히 추종자들의 영성 수련을 위해 복음서를 각색한 책인데, 1548년 교황 파울루스 3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이 시기의 후반에 그는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1523년 3월 바르셀로나를 떠나 로마, 베네치아, 키프로스를 거쳐 9월 4일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지만 라틴 교회 성소들을 관리하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베타니아, 올리브 산, 베들레헴, 요르단 강, 시험의 산을 순례한 뒤 10월 3일 팔레스타인을 떠나 키프로스와 베네치아를 거쳐서 1524년 3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된 순례자는 깊이 고민하던 끝에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한동안 공부하기로 결심했다"(〈자서전 50〉). 여기에서 자신을 '순례자'라고 부른 그는 가능한 한 좋은 교육을 받기로 결심한다. 불과 몇 년 안에 사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사제 준비기간을 12년 이상으로 늘려 잡았고,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공부를 다 마쳤을 나이에 지겨운 수업을 받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아마 그가 군인이었을 때의 경험을 통해 세심히 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그는 잘 훈련받은 사람이 짧은 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을 훈련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걸려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2년 가까이 공부하다가 1526년 알칼라로 옮겼는데, 이때 이미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이들 무리는 독특한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냐시오는 이단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혔으며 재판을 받아 무죄 판결을 받고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그곳에서는 그는 물론 동료들까지도 구속되었고 이번에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공부를 마칠 때까지는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제자들과 헤어져 에스빠냐를 떠났다.
프랑스에 오래 머무는 동안 유명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료들을 모았는데 이들이 훗날의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는 이 수도회가 배출한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있었다. 1534년 8월 15일 적은 무리를 이끌고 몽마르트르 근교로 가서 수도회를 세우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서로 청빈·정결·순명의 맹세를 했다.
1535년초 신학수업을 마치기 직전 건강이 나빠져 파리를 떠난 뒤, 6개월 이상 에스빠냐에 있다가 볼로냐와 베네치아로 가서 혼자 공부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열망했으나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와 대부분의 동료들은 1537년 6월 24일 성직 임명을 받았다. 그뒤 18개월 동안 성직 경험을 쌓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했고, 이때 아직 대중에게 설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생애 가운데 손꼽히는 중요한 체험을 했다. 어느 날 기도하는 도중에 어깨에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곁에서 영원한 성부(聖父)가 "이 사람을 너의 종으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자, 예수가 그를 데려다가 "나의 뜻을 따라 너는 우리를 섬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듯이 느꼈던 것이다. 1538년 성탄 대축일,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최초로 대중강론을 했으며, 이 강론을 끝으로 그의 생애의 3번째 시기인 진지했던 그의 학업 시기는 마감된다.
로욜라는 로마에 그레고리아눔대학교의 전신인 로마대학을 세웠고, 독일인 사제 후보생을 위한 신학교 게르마니쿰(Germanicum)을 세웠으며, 윤락여성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한 요양소를 세웠다.
그는 예수회 총회장으로 있는 동안 자주 병을 앓았고, 1551년 1월 병세가 악화되어 동료들에게 총회장직 사임을 수락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병중에도 불구하고 1556년 7월 죽는 날까지 예수회를 계속 인도했다. 만레사 시절부터 로욜라는 기도형식을 연습하여 이 기도 내용을 훗날 〈영성수련〉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으며, 이 책은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책과 견줄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으나, 교회 안팎에서 반대도 또한 많았다. 일찍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로욜라를 주요대적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고 일부 가톨릭교도들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은밀한 프로테스탄트라고 비난하는 등 그가 신앙생활에 일으킨 혁신은 구교·신교 모두의 비판을 받았다.
사후에는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복자로 선포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우리는 이 "회심의 방"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위대한 성인들을 통해 교회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그리고 이냐시오 성인이 강조한 영적 식별력을 키워나갈 것을 다짐했으며,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로 온전히 방향을 바꾸는 회개가 이루어져야 함을
이 거룩한 곳에서 다시 한 번 깨닫고 우리 각자의 회개를 위한 은총을 청하였다.
생가를 에서 나와 우리는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원래 로욜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예정을 바꾸어 산세바스띠안(San Sebastian)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순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루르드로 향하였다.
다음 글 : [여행] - 프사모 성지순례 15 - 루르드(Lourdes) 1
아란싸쑤에서 피정을 겸한 편안한 휴식을 취한 다음 날 (2/3, 수) 아침
우리는 식사를 하고 바로 바스크가 배출한 걸출한 성인 이냐시오의 고향 로욜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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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an Ignacio de Loyola)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Guipuzcoa)에 있는 오래된 로욜라 성에서 부유한 귀족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506년 카스티야 왕국의 재무관인 친척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시종, 1517년 나헤라의 공작이며 나바레의 부왕(副王)인 다른 친척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를 섬기는 기사가 되었는데, 라라는 그에게 군사 및 외교 임무를 맡겼다.
1521년 5월 20일 프랑스군에 맞서 팜플로나 요새를 방어하던 중 포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에 심한 골절상, 왼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 사건을 끝으로 그의 생애 제1기는 마감된다. 〈자서전 1 Autobiography 1〉에서 당시의 자신은 "명성을 얻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군사훈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세상의 허영에 빠진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생애 초기의 그는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았는데 호색적이라기보다는 거만한 사람이었다.
성자다운 삶으로의 전환은 그의 생애 2번째 시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의 삶은 1기의 삶보다 잘 알려져 있다. 팜플로나에서 다친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은 뒤 1521년 6월에 로욜라 성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한동안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처음 탈골을 바로잡을 때 저지른 실수를 고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은 뒤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그는 로욜라 성에 있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으며, 책을 읽지 않을 때는 과거에 읽었던 전쟁이야기를 회상하거나 아름다운 옛 애인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시기의 처음에는 성인전에 관심을 쏟았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신성한 기사도라고 생각한 시토 수도회의 수사 한 사람이 쓴 여러 성인들에 대한 소개가 성인전에 실려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인생관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 성인의 거룩한 금욕생활을 본받기로 결심했다.
1522년 2월 가족을 떠나, 스페인 북동쪽에 있는 순례지 몬트세라트로 가서 참회용 베옷을 입고 야망을 포기한다는 표시로 성모 마리아 상 옆에 그가 늘 차고 다니던 장검과 단검을 걸어놓고 사흘간 죄를 고백했으며, 3월 24일에는 밤을 지새면서 기도했다. 다음날 바르셀로나에서 48㎞ 떨어진 만레사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에서 지낸 1522년 3월 25일부터 1523년 2월 중순까지의 기간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거지처럼 살았다. 음식을 구걸하여 조금만 먹고 마시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고 한동안 머리를 매만지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손톱도 깎지 않았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하루에 7시간씩 기도했는데, 종종 만레사 외곽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기도했다.
만레사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영적인 시련, 기쁨, 내적인 빛을 얻었다. 만레사에서 "영성수련 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파리에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1535) 틈틈이 그 책을 보완했다. 이 책은 생생하고 역동적인 영성 체계를 담은 영적 무장에 관한 지침서로서 다른 사람들, 특히 추종자들의 영성 수련을 위해 복음서를 각색한 책인데, 1548년 교황 파울루스 3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이 시기의 후반에 그는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1523년 3월 바르셀로나를 떠나 로마, 베네치아, 키프로스를 거쳐 9월 4일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지만 라틴 교회 성소들을 관리하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베타니아, 올리브 산, 베들레헴, 요르단 강, 시험의 산을 순례한 뒤 10월 3일 팔레스타인을 떠나 키프로스와 베네치아를 거쳐서 1524년 3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된 순례자는 깊이 고민하던 끝에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한동안 공부하기로 결심했다"(〈자서전 50〉). 여기에서 자신을 '순례자'라고 부른 그는 가능한 한 좋은 교육을 받기로 결심한다. 불과 몇 년 안에 사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사제 준비기간을 12년 이상으로 늘려 잡았고,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공부를 다 마쳤을 나이에 지겨운 수업을 받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아마 그가 군인이었을 때의 경험을 통해 세심히 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그는 잘 훈련받은 사람이 짧은 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을 훈련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걸려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2년 가까이 공부하다가 1526년 알칼라로 옮겼는데, 이때 이미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이들 무리는 독특한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냐시오는 이단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혔으며 재판을 받아 무죄 판결을 받고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그곳에서는 그는 물론 동료들까지도 구속되었고 이번에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공부를 마칠 때까지는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제자들과 헤어져 에스빠냐를 떠났다.
프랑스에 오래 머무는 동안 유명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료들을 모았는데 이들이 훗날의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는 이 수도회가 배출한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있었다. 1534년 8월 15일 적은 무리를 이끌고 몽마르트르 근교로 가서 수도회를 세우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서로 청빈·정결·순명의 맹세를 했다.
1535년초 신학수업을 마치기 직전 건강이 나빠져 파리를 떠난 뒤, 6개월 이상 에스빠냐에 있다가 볼로냐와 베네치아로 가서 혼자 공부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열망했으나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와 대부분의 동료들은 1537년 6월 24일 성직 임명을 받았다. 그뒤 18개월 동안 성직 경험을 쌓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했고, 이때 아직 대중에게 설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생애 가운데 손꼽히는 중요한 체험을 했다. 어느 날 기도하는 도중에 어깨에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곁에서 영원한 성부(聖父)가 "이 사람을 너의 종으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자, 예수가 그를 데려다가 "나의 뜻을 따라 너는 우리를 섬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듯이 느꼈던 것이다. 1538년 성탄 대축일,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최초로 대중강론을 했으며, 이 강론을 끝으로 그의 생애의 3번째 시기인 진지했던 그의 학업 시기는 마감된다.
로욜라는 로마에 그레고리아눔대학교의 전신인 로마대학을 세웠고, 독일인 사제 후보생을 위한 신학교 게르마니쿰(Germanicum)을 세웠으며, 윤락여성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한 요양소를 세웠다.
그는 예수회 총회장으로 있는 동안 자주 병을 앓았고, 1551년 1월 병세가 악화되어 동료들에게 총회장직 사임을 수락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병중에도 불구하고 1556년 7월 죽는 날까지 예수회를 계속 인도했다. 만레사 시절부터 로욜라는 기도형식을 연습하여 이 기도 내용을 훗날 〈영성수련〉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으며, 이 책은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책과 견줄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으나, 교회 안팎에서 반대도 또한 많았다. 일찍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로욜라를 주요대적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고 일부 가톨릭교도들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은밀한 프로테스탄트라고 비난하는 등 그가 신앙생활에 일으킨 혁신은 구교·신교 모두의 비판을 받았다.
사후에는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복자로 선포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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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는 얕으막한 산에 싸인 아주 작은 마을이다.
전에는 이곳이 지형이 높아 요새로 쓰인 곳을 싸움을 없애려고 요새를 성으로 바꾸라고 명령해
그곳에 로욜라 성인의 궁전같은 집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각 방에서 녹음으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전에는 이곳이 지형이 높아 요새로 쓰인 곳을 싸움을 없애려고 요새를 성으로 바꾸라고 명령해
그곳에 로욜라 성인의 궁전같은 집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각 방에서 녹음으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냐시오가 탄생한 곳
1521년의 팜플로나(모형)
아란싸쑤의 성모. 이냐시오는 아란싸쑤도 순례하였다고 한다.
이냐시오가 결정적으로 회심한 곳. 현재 경당이다.
위대한 성인들을 통해 교회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그리고 이냐시오 성인이 강조한 영적 식별력을 키워나갈 것을 다짐했으며,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로 온전히 방향을 바꾸는 회개가 이루어져야 함을
이 거룩한 곳에서 다시 한 번 깨닫고 우리 각자의 회개를 위한 은총을 청하였다.
생가를 에서 나와 우리는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원래 로욜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예정을 바꾸어 산세바스띠안(San Sebastian)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순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루르드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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