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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행

프사모 성지순례 15 - 루르드(Lourdes) 1

by 大建 201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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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프사모 성지순례 14 - 로욜라(Loyola)

산 세바스티안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맛나게 식사를 한 후 우리는 이제 에스빠냐를 벗어나 마지막 목적지인 루르드가 있는 프랑스 땅에 들어서게 된다.
"아디오스, 에스빠냐!(¡Adios, España!)"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아버지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는 프랑스를 좋아하여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꼬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란치스꼬 본인도 프랑스를 좋아하여 프랑스어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완덕의 거울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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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France)

유럽 서부에 있는 공화국. 민족 대이동의 결과 5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성립하여 백 년 전쟁 이후 왕권이 신장되었고, 17~18세기에는 유럽의 지도적인 위치에 군림하였다. 1789년의 혁명으로 공화정이 성립되었으며 1958년 이후 드골에 의한 제오 공화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유럽 연합을 세울 때부터 유럽 연합 내에서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다(1966년 탈퇴, 1992년 재가입).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고 유럽 굴지의 농업국이며, 주민은 라틴계로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이다. 수도는 파리, 면적은 55만 1208㎢.

루르드(Lourdes)
프랑스 남서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지방 오트피레네 주에 있는 순례도시.
툴루즈 남서쪽에 있다. 피레네 산맥 기슭에 위치하며 지금은 급류인 가브드포 강의 양안(兩岸)으로 발전된 이 도시는 중세시대에 그 성채와 함께 전략적 요새를 이루었다. 백년전쟁중 프랑스가 18개월에 걸친 포위공격 끝에 1406년 잉글랜드로부터 빼앗았다. 가브드포 강 우안(右岸)에 세워진 중세시대 성은 흥미를 끄는 14세기식의 아성(牙城)을 갖고 있다. 이 성은 루이 14세(1643~1715)가 등극한 때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국사범의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루르드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은 1858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2월 11일에서 7월 16일 사이에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14세의 소녀가 루르드에서 가까운 가브드포 강 좌안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수차례 목격했다. 1862년 교황이 그 발현은 진짜 계시라고 선포하여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공경이 공인받게 되었다. 베르나데트에게 계시된 그 동굴의 지하 샘물은 불치병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선포되었으며, 그때부터 루르드는 순례의 대중심지가 되었다. 환자나 불구자 5만여 명을 포함하여 거의 3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매년 이곳을 찾고 있다. 1876년 동굴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가 많은 수의 순례자들로 점점 비좁게 되자 1958년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지하교회가 세워졌다. 인구 17,252(1982).
cf.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6r21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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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발현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무염시태를 새 신덕도리로 반포하신 후(1854년 12월) 3년 2개월 째 되는 날이었다. 가난한 물방앗간 집에서 출
베르나데뜨 수비루
생한 베르나데뜨(벨라데따) 수비루라는 13세의 소녀가 강을 건너 마싸비엘 부근에 가서 땔나무를 하기 위하여 흘러 내려온 나무를 한참 줍고 있을 때 돌연 큰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라 뒤를 보니까 마침 굴속에 아름답고 어여쁜 한 부인이 계셨다. 그는 몸에 백설과 같은 흰옷을 입고, 허리에는 하늘색의 띠를 두르고 손에는 백주금쇄(白珠金鎖)의 묵주를 들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벨라데따는 그이가 누구이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어 같이 기도를 바치고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벨라데따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께 그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월 14일 벨라데따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 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방문하였다. 그는 예상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의 벨라데따의 탈혼상태에 놀라 그와 소리를 합쳐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 갈멜산의 성모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벨라데따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하여 종종 수백만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3월 25일 성모 영보축일에 16회 째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벨라데따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분이 성모 마리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벨라데따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사제에게 말하라"고도 분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벨라데따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이다." 하고 고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2월 25일 9회째 발현에서는 "샘의 물을 마시고 씻어라"고 명령받았다. 벨라데따는 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를 영적으로 낫게 하고, 매일 12만2천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는 루르드의 영천(靈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영천의 난치병에 대한 효능은 실로 놀랄만한 것으로써 지금까지 영수(靈水)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1861년까지 3년 동안에 이미 100건 가량의 완치 사례가 있었고, 의사단(醫師團)의 엄밀한 조사에 의해서도 "그 중의 15건은 적어도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기적이다." 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 교구의 주교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에 순례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되었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멀고 먼 외국에서도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이 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전달을 간구했으며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영수(靈水)의 효능으로 난치병을 회복한 자도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하였다.  

리용시의 한 조각가 파비슈는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모습을 조각하여 그것을 [마사비엘]의 동굴 안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 그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오늘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은 바로 이것이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달로 은혜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의 원의대로 그곳에 건립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 2일 축성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져 매년 평균 60만명인데, 1933년의 발현 75주년에는 실로 150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루르드 의국조사위원(醫局調査委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를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어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성모상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이며 또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성모님께서는 피레네 방언으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데따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제대 왼쪽 동굴 안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 아래에는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 당시의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데따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올랐던 샘이 있다. 이 샘의 물은 몇 개의 큰 저수통에 저장되어서 목욕하는데 공급이 되고 또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된 샘에도 공급된다. 샘 왼쪽에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 위에 성모님께서 벨라데따에게 여러 번 발현 당시에 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그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로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가브강을 따라 동굴을 지나가면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1955년에 다시 지어놓았던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목욕실로 지어진 건물이다. 여기서 병자나 건강한 이들 모두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초대되고 있으며 수많은 이들이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그리고 오후 2시 30분에서 4시까지 목욕물에 들어간다. 
 
맨 위에 지어진 대성당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라"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그 성당의 제대가 바로 성모님 발현 장소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성당은 출구가 왼쪽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당 양쪽의 유리문은 발현 당시부터 1876년 루르드 성모상 하관의 역사까지 계속 보여주고 있으며 또 좀더 위쪽 유리문들은 세상 태초부터 비오 9세까지 정식 [교의]로서 발표하시기까지의 성모 무염시태 신비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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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드에 도착하여 우리는 바로 숙소인 Hotel Mercure Louredes Imperial(★★★★)에 여장을 풀고
바로 성지로 갔다.
루르드에서 봉사하고 계신 예수성심수녀회 소속 수녀님 두분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수녀님들로부터 간단한 성지 개관에 대해 듣고 우리는 장엄 촛불 행렬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겨울철 순례객들이 많지 않을 때는 장엄 행렬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없이
이미 이탈라이어로 로사리오 기도가 진행되고 있는 발현지를 기고 흐르는 강 건너편에서
성모상을 바라보며 우리 말로 묵주의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고
호텔로 돌아와 숙소를 한 다음 루르드에서의 첫 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