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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자캐오는 왜 나무에 올라갔나?

by 大建 2013. 11. 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루까 19,1-10)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비록 동족들에게 죄인 취급과 무시를 당하지만 그래도 돈많은 세관장이었다. 성경은 다른 세리들과는 달리 자캐오는 "세관장"이었음을 명시한다. 오늘날로 치면 지방 세무서장 쯤되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또 부자였다고 하니 나름대로 위세를 떨치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 자캐오가 예수님 일행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키가 작은 것 가지고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위신을 생각하는 처지였을텐데 왜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성서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알다"라는 뜻을 지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머리로만, 논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으로, 온존재로 깨달아 아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보는 대상이 더 이상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관계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그는 예수님을 알고 싶어 했으나 알 수가 없어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이야기다.

자캐오는 그분이 참 구원자이심,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은 변화된다. 변화될 수 밖에 없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
이전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신경도 안 쓰고 살았지만 이제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솔직이 인정하고 기워갚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예수님을 보게, 알게 되고, 그분이 나와 관계되는 분으로 내 삶 안에 들어오셨는데 
내가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한다면, 변화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것이다.
그분과의 만남은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그분이 오신 뜻이었다.

이렇게 회개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죄로 인하여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사람이 다시 복권되어 하느님 나라 안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님을 만나러, 뵈러(보러) 나가기로 하자. 그분을 뵈옵고 그분을 알게 될 때 우리도 회개할 수 있을 것이고 회개를 해야 참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남의 눈치보며 살아갈 필요 없지 않는가!
남의 시선이 두려워 나무에 올라가서 그분을 뵙지 못하고 군중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듣는다면 우리에게 회개와 구원은 멀기만 한 이야기가 된다.

기를 쓰고 나무 위에 올라가 그분을 뵙고야 말겠다는 자세를 오늘 요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