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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행

제주도 여행 3

by 大建 201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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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리는 기상을 하여 바로 인근에 있는 용수 공소(성 김대건 표착 기념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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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103위 순교성인들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라파엘호의 구조를 확인하고 150여 년 전의 선형을 복원하였다(길이 13.5, 폭 4.8, 깊이 2.1미터). 그리고 그 해 9월 상해를 출발해 제주에 도착하는 해상 성지순례를 계획하였으나 중국 정부의 비협조로 상해에 배를 내리지 못해 공해상에서부터 제주까지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한 후 9월 19일 김대건 신부가 표착했던 용수리 포구에 입항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인근의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되다가 2006년 11월 1일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용수리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2층 콘크리트 구조로 세워진 기념관 외형은 라파엘호의 형태를 본떠 건립되었고, 내부에는 성 김대건 신부 유해 공경실과 영상실,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2008년 9월 20일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의 정면은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을 재현했으며, 지붕은 거센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했다. 또 등대 모양의 종탑은 어둠속에서 빛을 비춰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가톨릭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선교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이미 일기예보를 통해 알고 있던대로 이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강우량은 많지 않았기에 대부분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들고 이 날 일정을 시작하였다.

먼저 우리가 향한 곳은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다.

정난주(마리아)는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으로, 가계상으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며 정하상(바오로) 성인의 누님이 된다.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 마리아는 서울 아현의 시집에서 생활하였다. 바로 그 해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은 이승훈,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과거를 포기하교 교회 일을 도왔으며, 마리아는 이러한 남편을 도와 아현의 집을 신앙 공동체로 가꾸는 데 노력하였다.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게 되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사영이 교회 재건을 위해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긴 뒤, 1801년 2월 10일경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마리아는 특히 어린 경한이를 옥에서 키워야 했으므로 육정에서 오는 또 다른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하였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1838년 2월 선종하였으며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한 개인과 가문이 몰락해가는 비극을 담은 박해의 역사를 되새기며, 정난주 마리아처럼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기도 한 후 다음 행선지인 용머리 해안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파도가 치고 있었으며 내리는 비로 길이 미끄러울 수 있어 해변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고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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