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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톨릭, 종교

공세리 성당

by 大建 2014. 8. 11.

공세리 성당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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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천주교회는 1895년 파리 외방 선교회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당시 동네 한 가운데 신자집을 임시로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시작되었다. 그 후 1897년 창고 건물(현 사제관)을 헐고 구 성당과 구 사제관을 임시로 지었다.
     
현재의 성당이 위치한 80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  곡창지(貢稅 穀倉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성종 9년(1476년) 세곡 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중종 18년(1524년) 80칸의 창고를 지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원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집결한 후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세금을 거두어 임시 보관했던 자리가 400년이 지난 1890년에 들어서면서 내포 지방에 상륙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인 드비즈 신부는 1895년 5월 6일부터 1931년 7월 5일까지 본당 사목을 하였다. 현재의 성당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성당을 완공했다. 드비즈 신부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 조제로 지금은 고인이 된 유명한 이명래 요한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키기도 하였다.


본당 구내에 삼위의 순교자를 모신 묘가 자리하고 있다. 1863년 조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밀두리, 걸매포, 해암리 신자 28명이 수원, 서울, 공주 등으로 끌려가서 고문,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박의서, 박익서, 박원서 삼형제의 시신을 신자 한 분이 찾아 본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 모셨다가, 그분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에 따라 1988년 9월 20일 본당 구내로 모셔왔다. "명인치명사적" 제 11권에 기록되어 있기를 1867년 병인 풍파를 당해 삼형제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 말하기를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였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2000년 성당과 구 사제관이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제 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10월 새 사제관, 수녀원, 피정의 집(예수마음 피정의 집으로 개칭), 성체조배실을 완공하고 주변 정비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성체조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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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당진 도비도 해안에 나가 석양을 찍고자 했지만 역시 허탕만 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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