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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이름 값을 하자

by 大建 2014. 12. 23.

대림 제4 주간 화요일(12월 23일, 루까 1,57-66)

내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당시에 토정비결을 보시던 외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물(水)에 큰 해를 입을 수가 있다고 해서 빼어나게 수영을 잘 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수영(秀泳)이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나를 물가에 보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시고 물을 조심하도록 각인시키셔서 결국 나는 아직까지도 수영을 못 배웠다. 

이름은 한번 지어지면 평생 그 이름으로 불리기에 정성껏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주변에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작명소들이 많은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고 하였다.  이렇게 이름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나"를 표현해주는 것인다.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말이고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주는 말이며, 나의 실체가 사라지더라도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 말이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이름 때문에 일어난 일을 전해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이웃과 친척들은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요한"은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을 지니는 이름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통하여 당신께서 엘리사벳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게 해주셨고, 또 그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임을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즈카르야는 그것을 믿지 않아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앗기에 자신을 표현할 능력도 앗긴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믿음 안에서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그의 입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세상에 그분의 구원 은혜를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름을 얻게 된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은 과연 그 이름대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소리, 사자(使者)로서 살아가게 된다. 요한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만백성이 알게 되었다. 결국 요한은 이름 값을 하는 인생을 산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름값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부모님이 주신 이름 외에도 하느님을 사랑한 성인들을 본받기 위한 세례명을 별도로 지니고 있는데, 과연 하느님과, 주보성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46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