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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영광을 위하여

by 大建 200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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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 주일(가해)

곧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영광만을 바라며
그 속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세상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희생보다는 편안함을 바라고,
형제들을 사랑하기보다는 형제들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더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기보다는 더 갖기를 열망하고
사회적 위치나 부귀영화에 연연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로 옮기고
회개와 보속의 시간을 가지면서 극기와 희생으로 이웃과 진정으로 나누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오늘 제1 독서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아브라함 역시 그 동안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삶의 기반을 잡았지만
그것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결코 집착하거나 안주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이사악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었기에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려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그러한 삶의 축복을 주실 수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그후에 하느님의 축복이 믿음의 사람인 그에게 가득하게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변모하시는 이야기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 중에 들게 될 것임을 전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극치의 사랑의 행위였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한다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우리의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한 후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고통의 인내를 영광스럽게 하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임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에 믿음을 두고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영광이며 은총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필립 3,21).
그러한 영광스러운 변화는 아브라함이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와 같이
주님께 깊은 신뢰를 두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대전환을 이룰 때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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