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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1

by 大建 2008. 2. 21.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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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작음, 겸손, 형제애 등 프란치스꼬의 여러 가지 정신은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따르는 지표가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정신을 완벽하게 통합하며 또 현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정신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은 평화의 사도라 불리시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현대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성인이 바로 프란치스꼬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6년에 평화를 위한 세계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을 사부님의 도시, 평화의 도시인 아씨시에서 소집하였으며, 또한 1989년 성인의 축일에는 한국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세계 성체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조국은 분단의 결과로 수많은 가족과 개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없이할 수 있는 참된 평화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남북 상호간은 반대편의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휴전선을 사이로 하고 1,000만 이상의 가정이 이산(離散)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한반   도는 평방 킬로 메타 당 군사력(군인, 무기)의 집중이 세계 최고라는 씁쓸한 기록을 지니고 있다" border="0">.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나라 중의 하나인 채로 남아 있고, 경제적 번영을 자랑하는 남쪽에서는 타인의 존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기주의, 윤리적 가치들의 황폐 등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골이 깊어지고 있으며, 도시와 지방, 그리고 지방간의 갈등도 적지 않아 소외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 형편이다1989 한국 주교단 사목교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2: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회보  48(1988.11.1), 48-2 참조." border="0">.

이렇게 볼 때 세계의 그 어느 곳 못지 않게 우리 조국은 평화를 저해하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평화를 갈망하는 염원 또한 그 어떤 민족 못지 않게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특별히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을 살아가는 프란치스꼬인으로서 우리가 가장 현실적으로 구현해 내어야 할 성 프란치스꼬의 정신은 평화의 정신이요, 우리 또한 이 시대의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메시지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평화의 메시지는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 그리고 모든 인류가 갈망하는 평화, 수많은 선한 의지의 사람들이 건설하려고 하는 그 평화에 오늘날도 영감(靈感)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계에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프란치스꼬가 살았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그가 회개 이전에 그 사회 안에서 겪었던 영적 체험들에 대해서 알아 볼 것이다. 프란치스꼬가 살았던 시대는 교회와 제국, 봉건 토후들과 신흥 상인 계급, 그리스도교와 회교 등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대였다. 이러한 투쟁의 시기에, 전쟁에도 참여하였던 사부님은 평화의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의 복음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신 평화의 왕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 때부터 복음은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에게 있어 “생활 양식”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영적 조망 아래 우리는 제2 장에서 프란치스꼬가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들, 회교와의 전쟁 등에 개입하여 이룩한 평화에 대하여 분석을 해볼 것이다. 전기 작가들과 형제회 외부의 사가(史家)들에 의하여 전해지는 이러한 평화를 위한 개입은 분열과 증오, 폭력과 전쟁 앞에서 성 프란치스꼬가 결코 무관심한 관망자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평화를 위한 개입들은 사부님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충실성으로부터 당연히 발출되는 결과였다.

계속해서 제3 장에서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글들에 나타나는 평화의 메시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평화”, “내적 생활의 일치와 평화”, “범우주적 형제애와 평화”라는 세 가지 측면이 강조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씨시의 가난뱅이의 평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가 오늘날에 갖는 현실성에 대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최근의 교회 교도권과 프란치스칸 가족들의 문헌과 가르침 등을 통하여 우리는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메시지가 오늘날도 현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이상을 보다 깊이 잘 이해하려는 이러한 우리의 작은 노력이 평화를 갈망하는 오늘날의 한국과 전세계, 더 나아가서는 전 우주에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가 심어지는 촉매 역할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그러한 평화를 이 세상에 전하기에 앞서 “우리의 마음 속에 가능한 한 가득히 간직하기”세 동료들의 전기 58." border="0"> 위하여 우리 각자가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I.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역사적-영적 체험


1. 시대적 상황

한 사람의 정신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치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처럼.
    프란치스꼬가 살던 시대는 평화의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경쟁, 분열, 대립, 폭력과 전쟁의 시대였다. 특히 전기 작가들은 우리에게 교회와 제국, 봉건 지주와 신흥 상인 계급, 기독교와 회교의 갈등을 전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평화 그분의 평화(요한 14,27 참조)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형제들은 당시의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그 뿌리를 권력과 재물의 소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분열을 체험하였다.

                                                                                                                                           

                                                                       1.1. 교회와 제국간의 갈등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 이후, 교황과 황제 사이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교회와 제국은 서로 자치권을 주장하고 이는 양쪽에 분열을 조장하여 멈추지 않는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프란치스꼬 당시의 교황이던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죽자(1197), 그 황후는 교황을 자기 아들 즉 황태자의 후견인으로 세운다. 그러나 Anweiler의 Marcualdo라는 독일의 한 남작이 후견권과 국가 통치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면서 교황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인노첸시오 교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권한을 양도할 의도가 없었으며 무력으로 자기 권리를 방어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벌어졌으니 그것은 황후가 시실리아의 영주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인노첸시오 교황은 브리엔네(Brienne)의 괄떼리오라는 백작에게 군 통수권을 맡길 때까지 오랜 기간을 버틴다. 아씨시를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아뿔리아라는 도시에서 교황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에 고무되어 교황군에 가담할 군대를 일으키게 된다인노첸시오 3세와 마르꽐도 사이의 대립에 대해서, J. 요르겐센,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최정오 역, 계성출판사, 1991, 33-34; B. Llorca et al., Historia de la Iglesia Católica II, BAC(Madrid), 1958, 548 참조." border="0">.
    이 때 프란치스꼬도 아뿔리아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하려고 출발하였지만 도중에 스뽈레또라는 곳에서 신비로운 환시를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1생애 4; 2생애 6['footnote].

.                                                        
                         
                                           1.2.
봉건 영주들과 신흥 상인 계급간의 갈등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유럽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농업이 발달을 하게 되었었다. 또한 동시에 그야말로 참된 상업화와 도시화의 혁명이 일어난다. 인력이 풍부해지고 도로 통행이 안전해지자 생산품의 유통이 용이해지게 된다. 금전과 은전의 주조 또한 상무(商務) 관계를 용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동시에 도시들이 크게 발달하게 된다. 상업 도시들은 교통과 방어가 편한 지역에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상업 도시의 인구는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즉 상인들, 수공업자들, 농부들, 이민자들 등이었다. 이곳의 시민들은 함께 뭉쳐서 영주들로부터 자유를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중산계급(中産階級, burguesía)의 발흥은 무엇보다도 행운에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림으로 해서 엄격한 구조의 봉건제도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기사가 되려는 허영심에 불타고 있던 프란치스꼬가  얼마나 그 전쟁에 참가하기를 갈망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회개를 하고 하느님의 종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 이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제4 차와 제5차 십자군 운동의 시기에 살았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맛본 이후 당시의 신학자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주제 된다. 그의 행동에는 무기나 멸시, 증오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오히려 형제애만이 그의 삶을 채워 주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해 앞으로 더욱 자세하게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