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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3

by 大建 2008.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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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꼬


초기의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프란치스꼬의 복음적 성소는 천사들의 모후 성 마리아 성당에서 그가 사도들의 파견에 대한 복음을 들을 때 명확해졌다고 한다.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각주:1].
 
토마스 첼라노에 의하면 프란치스꼬는 이 복음을 듣는 순간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 생애 22. 대전기 3,1; 세 동료 25 참조).

프란치스꼬는 뽀르치웅꼴라에서 들은 사도들의 파견에 대한 이 복음의 구절들을 하느님의 계시로서 항상 기억하게 된다(유언 14 절과 23 절 참조). 한편, 전기 작가들은 이즈음이 아씨시의 가난뱅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중의 하나였음을 강조한다. 그가 그 동안 매우 애착을 가졌던 은둔 생활의 이상과 정신을 완전히 포기함이 없이, 프란치스꼬는 사도적 생활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평화와 참회를 선포하기 시작한다[각주:2].   
성 보나벤뚜라는 그의 “대전기” 제 3 장에서 프란치스꼬가 평화를 선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권고로써 진실한 평화 안에 화해시켰다고 전한다.
  “(프란치스꼬가) 설교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하면서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가 후에 고백하였듯이 그러한 인사를 신적 계시에 의해 배웠던 것이다. 예언서의 말씀들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예언자들의 영에 의하여 감도되어 평화를 전하고,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그리스도와 반목하고 구원과 동떨어져 살고 있던 이들을 유익한 권고로써 진실한 평화 안에 화해시켰다”(대전기 I,3,1).

프란치스꼬는 이처럼 평화의 인사를 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기 작가들이나 형제회 외부의 역사가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갈등과 반목, 전쟁이 있는 곳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화해를 이루고 구원을 전하였다.
그의 평화를 위한 개입들 중에 어떤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참된 예언적 행위로서 간주되고 있다. 성 프란치스꼬의 설교에 대하여 묘사할 때 세라핌적 박사는 그가 예언자들의 영에 의하여 감도되었다고 강조한다. 예언자란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회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미래가 현재에 의해서 조명되도록 전하는 그 뜻을 전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우리를 과거에 대한 인정과 미래에의 희망에로 초대한다[각주:3]. 예언자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그 힘을 얻는다. 마치 프란치스꼬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토마스 첼라노와 보나벤뚜라는 아씨시의 가난뱅이를 평화의 사도로 여기면서 그의 예언적 사명을 가장 잘 해석한 초기의 두 전기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1 생애 23 참조).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불화와 폭력 혹은 전쟁의 상황 앞에서 결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극단적인 “추종”과 복음에 따른 그의 “생활 양식”은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그 시대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투신케 하는 하나의 동기였다.
                                                                         
                                                                                                     
                                                                                                 1.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사료들은 특별히 증오와 폭력과 시민 전쟁에 의해 분열된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들에서의 성인의 개입을 강조한다.
초기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프란치스꼬가 최초로 직접적으로 개입한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던 도시는 아레쪼였다. 1217 년 총회 후에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로 가기로 프란치스꼬는 결정하였다.
“형제들이 아레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도시 전체가 무서운 스캔들과 밤낮의 치열한 전쟁에 짓눌려 있었다. 사실 그 곳에는 오랫동안 서로 증오해 오던 두 당파가 있었다”[각주:4].

토마스 첼라노에 따르면 “도시 주민 전체가 내란으로 파멸에 직면하여 있었다”고 한다(2 생애 108).
아레쪼에 도착하여 폭력과 주민 전체가 받고 있는 고통에 충격을 받고 아씨시의 가난뱅이는 도시 변두리에 있는 병원에서 하룻밤을 온전히 지새면서 기도에 잠심하게 된다. 토마스 첼라노는 중세 특유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느님의 사람은 그 도시 위에서 악마들이 희희낙낙거리며 주민들을 충동질해서 서로 파멸하도록 하는 것을 보았다”(2 생애 108).
그날 밤 그렇게 밤을 새워 기도를 한 후에 성 프란치스꼬는 실베스떼르 형제에게 시내로 들어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편에서” 구마경을 외울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 겸손한 형제는 즉시 거룩한 스승의 말에 순종하였다. 이러한 개입의 덕분에 “그로부터 금방 도시가 평화를 회복하였고 사람들은 큰 안정에 들어가 도시 법을 지켰다”(2 생애 108).
후에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성 보나벤뚜라는 아레쪼의 주민들이 “도시의 법에 의하여 서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또한,
“도시를 차지하고 있던 마귀들의 광포한 교만이 한 가난한 이의 지혜스러운 개입, 즉 프란치스꼬의 겸손함으로 축출되자 평화가 돌아왔고 그 도시는 구원을 얻게 되었다”(대전기 I,6,9).

이 순박한 이야기들에는 증오와 시기 아래에는 항구한 혹은 일시적인 멸망을 추구하는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음에 대한 프란치스꼬의 내적 확신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지혜보다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야 함을 알 수 있다[각주:5].

한편 귀족 가문들의 불목으로 인해 아레쪼보다 덜 하기는 하지만 역시 고통을 겪고 있던 볼로냐라는 도시에서도 사부님은 평화를 이룩하신다[각주:6].스팔라또의 토마스는 볼   로냐의 학생이었으며 후에 이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1222년 성모승천대축일에 그곳 광장에서 설교를 하실 때 “거의 모든 주민이 다 모였다”고 한다. 사부님의 말씀의 모든 내용이 그곳 주민들 간의 적대감을 해소시켜 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평화의 협약을 맺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의심할 나위없이 하느님께서 그의 말에 부어 넣어 주신 능력에 의하여, 너무나 증오가 깊었기에 자주 서로 피를 흘려야만 했던 귀족 가문들이 평화를 이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성 프란치스꼬의 볼로냐에서의 설교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스팔라또의 토마스는 성인의 모습이 거의 초라했었음을 강조한다. “그의 옷은 깔끔하지 못했고 그의 형상은 초라했으며 그의 얼굴은 전혀 다른 이의 매력을 끌만한 데가 없었다”[각주:7]. 볼로냐의 젊은 학생은 프란치스꼬의 설교의 효력이 그의 외적인 면,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이해한 것이다.
 
아레쪼와 볼로냐에서의 화해의 중재는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새로운 요소들을 담고 있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듯이, 그의 글에서는 사회 정의와 평화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재들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난다. 저 도시들에서 분열과 증오 그리고 폭력은 주민들 간에 불의가 축적된 직접적인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레쪼에서는 성 프란치스꼬와 실베스떼르 형제의 개입 이후에 “도시가 평화를 회복하였고 시민들은 큰 안정에 들어가 도시의 법을 지켰다”(2 생애 108). 성 보나벤뚜라는 더 나아가서 “도시가 평온해진 바로 그때 주민들은 큰 안정 속에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고 관찰한다(대전기 I,6,9).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를 위한 이러한 개입은 이사야의 예언의 참된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이사 32,17). 또한 야고보 사도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야고 3,18)라고 하지 않았던가?

볼로냐에서 프란치스꼬의 설교의 주제는 “시민들 사이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그들 사이에 평화의 협약을 맺도록 길을 잡았다”[각주:8]. 스팔라또의 토마스는 귀족 가문들 간의 증오가 너무 강했기에 결국 피를 부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성 프란치스꼬의 설교의 위력은 증오의 벽을 허물고 그들을 화해로 이끌었다고 한다.
작은 형제회 외부의 역사가이기는 하지만 스팔라또의 토마스의 기록에서 우리는 토마스 첼라노나 보나벤뚜라와 정확히 일치하는 관점의 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팔라또의 토마스가 강조하는 부분을 다시 한 번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성 프란치스꼬의 설교는 “시민들 사이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그들 사이에 평화의 협약을 맺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메시지에 대한 연구의 범위를 그의 글로 제한한다면 우리는 아씨시의 성인에게 있어서 내적이고 개인적인 평화만이 관심이 있었다고 결론 내리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들에서의 성인의 화해를 위한 개입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평화의 차원이 보다 넓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 루가 10,3-5; 마테 10,7-13 참조. 토마스 첼라노는 복음의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복음서들의 사도 파견의 권고들을 자의적으로 모아 놓고 있다 [본문으로]
  2. 1 생애 22-23; 1 생애 29; 세 동료 25; 대전기 I,3,2-3. 프란치스꼬의 사상 안에서 “평화와 참회”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참회”란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metanoia”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존재에로의 회개를 의미한다. 아씨시의 가   난뱅이가 그의 유언에서 “세상을 떠나고” “참회를 하기로” 결심한 것을 상기할 때 바로 참회의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참회는, 동시에, 평화라는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   한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이다; K. Esser, La Orden Franciscana, Orígenes e Ideales, Ed. Aránzazu (Oñate), 1976, 271-278 참조 [본문으로]
  3. B. Haering, Profetas, en: Nuevo diccionario de espiritualidad, Ed. Paulinas(Madrid), 1983, 1172 [본문으로]
  4. LP 108; “뻬루지아 전기”의 우리 말 역본인 최정오 역,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발자취, 분도출판사, 1977에는 이 이야기가 81번에 나와 있다. 앞으로 이 책은 뻬루지아 전기라고 약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5. O. Schumucki, San Francisco de Asís: mensajero de paz en su tiempo, en: SF 22(1979), 141 참조; O. Englebert는 프란치스꼬가 삼회의 창설로 시민 전쟁들을 끝나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같은 책, 157, n.51) [본문으로]
  6. Tomás de Spalato, Historia Salonitanorum, en: J.A. Guerra(Ed.), San Francisco de Asís, Escritos, biografías, documentos de la época, BAC(Madrid), 19853, 970. [본문으로]
  7. 같은 이, 같은 곳 [본문으로]
  8. Tomás de Spalato, 같은 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