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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2

by 大建 2008.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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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안에서의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영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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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젊은 몽상가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1182년에 태어났으니, 이 시기는 중상주의가 만개하던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그러한 상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포목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득세를 하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계층 출신인 프란치스꼬의 젊은 시절은 당연히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회오리 바람 속에서 발달하게 된다. 아씨시를 휘어잡고 있던 성채, 봉건 제도의 상징인 로까 마죠레를 시민들이 붕괴시킬 때 그는 16 살이었다. 그리고 아씨시의 시민들이 스스로 선포한 그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을 때 그는 17 살이었다. 로까 마죠레에서 나온 돌들이 새로운 성벽 건축에 이용되었다[각주:1]2008/02/22 - [사진/여행] - 이탈리아 성지순례 7 - 아씨시 2" border="0">.
“사바티에의 말대로, 훗날 산 다미아노와 뽀르치웅꼴라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돌과 몰탈을 취급하는 기술은 프란치스꼬가 이 무렵에 배웠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각주:2].

프란치스꼬가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사회적 변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다. 그 모든 의미를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는 당시의 새로운 사회가 주는 삶의 맛과 여유를 온전히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을 그 시대를 풍미하던 자유의 사상 안에 지냈으며 큰 기쁨을 맛보았다. 토마스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모든 이의 감탄의 대상이었고, 허식과 농담과 이상야릇한 행동과 부질없는 한담(閑談)과 노래, 그리고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옷차림 등에서 타(他)의 추종을 불허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는 매우 부유했지만 탐욕적이었다기보다는 탕아적이었으며, 돈의 축적자가 아니라 재산 낭비가였고, 조심스런 기업가라기 보다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청지기였다. 반면에 매우 인간적이었고, 매우 쉽게 대할 수 있었으며, 상냥했지만 불행히도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보가 되게 하는 경우조차도 있었다” (1 생애 2).

어쨌거나, 재산과 특권들을 잃은 아씨시의 귀족들은 뻬루지아로 피신을 해서 원조를 구하게 된다. 뻬루지아는 그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씨시에 대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시도한다. 그 동안 잠재적으로 쌓여 온 두 도시의 갈등이 이렇게 해서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 지오반니 다리의 전투에서 아씨시 사람들은 패배하였으며 프란치스꼬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서 1년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젊은 상인의 태도가 하도 품위가 있었기에, 민초들과 같은 감옥에서 지내지 않고, “영예스러운 중상 계급”을 위한 도시의 옛 규칙에 따라 기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세 동료 4).
감옥에서 기사들과 함께 지낸 이 체험은 당연히 프란치스꼬의 마음 안에 기사가 되려는 갈망을 더욱 크게 하였다. 브리엔네의 괄떼리오가 교황을 위하여 독일 제국을 거슬러 이탈리아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아뿔리아에서 군대를 소집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기사가 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프란치스꼬는 놓칠 수 없었다. 토마스 첼라노에 의하면 그는 “영예로운 기사 계급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장비들을 아낌없이 풍족하게 준비하면서 서둘렀다”(2 생애 6).
그러나 어느 날 하룻 밤을 지내게 된 스뽈레또에서 꿈 속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목소리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 이야기를 세 동료들의 전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몽사몽 간에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어떤 음성이 들려 왔다. 그가 자기의 모든 취지를 밝히자 그쪽에서 이렇게 물어 왔다: ‘누가 너를 보다 훌륭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 주인이겠느냐 아니면 종이겠느냐?’ 그가 답했다: ‘주인(Dominus)입니다’. 그쪽에서 다시 물어 왔다.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너는 종을 위하여 주인을 버리고, 머슴을 위하여 제후를 버리느냐?’ 이에 프란치스꼬가 물었다: ‘주여(Domine),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거기에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듣게 될 것이다’ … 아침이 되어 그는 … 기쁘고 밝은 모습으로 서둘러 아씨시를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세 동료 6).   

                                                                                             

2.2.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스뽈레또에서 돌아온지 얼마 뒤에 프란치스꼬의 삶은 극단적으로 변하였다. 홀로 지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여, 전에는 그가 반했던 세상의 일들에서 멀리 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하느님의 뜻을 구하였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전기 작가 엘르와 르끌레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심원한 것들에 자신을 바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싫증은 그의 눈을 열어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감히 대면하려고 하지 않았던 하나의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고뇌, 그렇게도 약속으로 가득 차고 그렇게도 거짓스러운 도시 지방 자치라는 세상의 고뇌였다 … 상인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왕노릇 하는 이 새로운 사회는 많은 비참한 현실을 감추고 있었다”[각주:3].

프란치스꼬는 도시가 숨기고 있는 이 비참함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그 사회가 배척하는 불행한 이들, 나환자들, 걸인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더욱 연민으로 다가가게 된다.
어떤 나환자와의 입맞춤은 그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그의 민감한 성격이 이 가련한 나환자들의 존재 앞에서 녹아 나게 된다. 그의 생애 끝 무렵에 이즈음의 회개시기에 대해 스스로 회상하듯이 “죄중에 있었기에”15) 유언 1. 나환자를 보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다. “죄중에 있던” 우리 사부님이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 곁의 길을 공포감이나 혐오감이 없이 지나가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16) 아씨시 주변에는 다섯 혹은 여섯 개의 나환자 수용소가 있었다[각주:4]. 여기에 그의 가장 큰 약점이 있었으며 도한 여기서 그는 가장 큰 승리를 거둔다. 한번은 주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저 신비스러운 음성이 그에게 들려 왔다.
“프란치스꼬야, 네가 육적으로 헛되이 좋아했던 것을 이제는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네가 나를 알기를 원한다면 달콤한 것 대신에 쓴 것을 택하여 너 자신을 경멸하여라. 순서가 바뀌어도 너는 내가 한 말에 맛을 들일 것이다”(2 생애 9).
과연 주님의 이 말씀으로 프란치스꼬는 구원과 은총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 말씀 안에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가 알려졌다. 이제 “새롭게 태어난” 프란치스꼬는 길에서 만난 나환자 형제에게 입을 맞추고, 후에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유언에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 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각주:5].

그런데 여기서 그의 회개의 다른 측면, 즉 십자가에 못밖히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나환자들 가운데서 생활하는 프란치스꼬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이 시기에 아씨시 교외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한 작은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자주 가고는 하였다.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다음과 같은 단순한 말로써 기도하고는 하였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19)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어느 날 이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그는 그의 마음 속에서 들려 오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프란치스꼬에게 모든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스뽈레또에서부터 들려 온 그 신비스러운 목소리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이었으며,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프란치스꼬와의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고 온유한 시선을 통하여 프란치스꼬에게 다가오셨던 것이다. 당연히,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생각에 상처를 입어 녹아 내렸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늘 주 예수의 성흔(聖痕)을 마음에 지니고 다녔으며, 그리하여, 후일에 그의 몸에 그분의 성흔들이 뚜렷이 복제되어 신비로운 형상으로 나타났다”(세 동료 14).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견뎌 내며 또 세상 사람들의 비참함을 몸소 택하신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 가는 프란치스꼬와 만나게 된다. 그의 마음 안에서는 새로운 영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하느님은 전쟁의 신도 아니요, 새로운 사회의 특권층, 즉 부유한 상인들의 하느님도 아니시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깨달음과 만남의 과정에서 프란치스꼬는 그의 삶이 저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밖히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감에 따라 자신의 내부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점점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던 이러한 “매혹”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생활 양식으로 삼게 한다21) 작은 형제회의 제1 회칙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과 정결 안   에 소유 없이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1,1). 그리고    유언에서는 “그리고 주님이 몇몇 형제들을 나에게 주신 후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   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14절) 하고 말한다. .
용서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은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리고 세상에 주신 선물이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시고 실현하신 자비 그 자체라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꼬는 복음의 이러한 메시지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다시 찾고 그분과 화해하게 된 프란치스꼬는 자기의 삶이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사도로서의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 매우 당연한 논리로 L. 하르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하느님께로 온전히 다시 전향(회개)한다면 하느님의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의 형제 자매인 인간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될 것이다”[각주:6].

  1. "[본문으로]
  2. J. 요르겐센, 같은 책, 31 [본문으로]
  3. E. Leclerc, Francisco de Asís: El retorno al Evangelio, Ed. Franciscana(Aránzazu, Oñate), 1982, 43 [본문으로]
  4. O. Englebert, Vida de S. Francisco de Asís, Cefepal(Santiago de Chile), 1973, 80, n.25 참조 [본문으로]
  5. 유언 2 - 3; 나환자와의 만남에 대하여, 2 생애 9; 세 동료 11 참조 [본문으로]
  6. L. Hardick, Francisco: pacífico y pacificador gracias a la pobreza, en SF 45(1986), 37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