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4

by 大建 2008. 2. 24.

이전 글 - 2008/02/23 - [믿음 희망 사랑/프란치스꼬]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중동에서
 
1205 년에 프란치스꼬가 프랑스의 기사 브리엔느의 괄떼리오의 편에서 싸우려고 아뿔리아로 향하였을 때 하나의 가설은 아뿔리아의 전투 이후에 그가 아마도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여 떠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가장 큰 꿈 중의 하나였다19) 초기 전기 작가들은 이 점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청년 시절 전체를 통하여 그를 매혹하고 있던 기사가 되려는 이상은 예루살렘 성지 회복에 일조하려는 꿈을 갖게 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한다..
그 때, 프란치스꼬는 주님께서 후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명, 그리스도교의 서방과 동방의 회교 사이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시작하도록 그를 부르시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교와 평화의 십자군 운동, 그것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이해하는 데 무척이나 오래 걸린 것이다.
성 보나벤뚜라는 스뽈레또에서의 프란치스꼬의 꿈을 묘사할 때 그가 궁전 안에서 경탄하고 있던 무기들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대전기 I,1,3), 이는 그로 하여금 성지로 떠나는 기사들이 출발 전에 행하던 착복식의 십자가를 상기시켰다.
스뽈레또의 환시 이후 아씨시로 프란치스꼬가 결정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리엔느의 괄떼리오를 위해 싸우러 자원으로 나섰을 때 꿈꾸었던 저 표지와는 정반대되는 표지를 지닌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열망으로 그는 1219년 6월 24일에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안꼬나 항에서 배를 타고 그는 같은 해 8월 말에 다미에따에 있는 십자군의 진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가 맞닥뜨린 참혹한 폭력과 전쟁의 광경 앞에서 그가 처음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교 군사들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동반하던 일루미나또 형제에게 의견을 물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만일 그 날에 교전을 벌리면 십자군이 불리하리라는 것을 보여주셨소. 내가 그들에게 이 말을 하면 나는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고, 가만히 있자니 양심을 속일 수 없고! 이러니 어쩌면 좋지요?” 그의 동료가 다음과 같이 말하여 대답하였다. “ 사부님, 당신은 어차피 바보로 여겨져 있고 그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니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양심의 짐을 덜으십시오. 그리고 사람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십시오”(2 생애 30).

십자군의 1219년 8월 29일의 비참한 패배 이후에 프란치스꼬는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예언적인 행위를 결심한다. 에집트의 술탄과 개인적으로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특유한 교회의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교황 사절로부터 하락을 받으려 노력하였다. 이에 뻴라지오 가이탄 추기경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아씨시의 가난뱅이가 한참을 고집을 부린 후에 추기경은 그이 뜻을 굽힐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허락한다. 제 5 차 십자군의 연대기 작가인 에르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추기경은 대답하기를 그들이 가는 것을 허락할 수도, 명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을 죽일 것이 뻔한 곳에 그들이 가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술탄에게 가면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추기경에게 졸라댔다. 추기경은 그들이 그곳에 가기를 매우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정 원한다면 갈 수는 있되 그의 허락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형제회 외부의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에집트의 술탄 멜렉 엘 카멜과의 만남은 전에 없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Jacobo de Vitry(비트리의 야고보)가 Historia Orientalis(동방의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는 참으로 생생하다.
“우리는 이 수도회의 창설자이며 스승, 단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프란치스꼬 형제라는 이가 에집트의 다미에따의 장벽 앞에 자리 잡고 있던 그리스도교 부대에 왔을 때 얼마나 성령의 열정에 불타서 오로지 신앙의 방패만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에집트의 술탄의 진지에 갔는지에 대한 증인이다. 사라센인들이 그를 길에서 붙잡았을 때 그는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나를 당신들의 주군께 데려다 주시오’. 그리고 술탄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술탄이 그를 보자 하느님의 사람 앞에서 아주 온순해져서 그와 그의 사람들은 프란치스꼬의 말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그러나, 결국 술탄은 자기 군대의 어떤 이들이 저 거룩한 사람의 말의 효과로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군대로 넘어갈까 두려워 그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존경의 예를 갖추어 우리 진지로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성 프란치스꼬의 시대에 회교 세계에 대한 반복음적 자세는 교회의 가장 큰 모순 중의 하나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회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커다란 악의 세력이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십자군에 의해 발발된 성전(聖戰)을 고무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회교도들을 죽일 때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까지 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게 되는 모든 군인들은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보장받는 것이라”고 하였다간의 불화를 조정하여 화해시켰다.

   “성 프란치스꼬가  ‘태양의 노래’라는 피조물의 찬가를 만들고 난 뒤의 일이다. 아씨시의 주교와 시장과의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주교는 시장을 파문하고 시장은 어느 누구도 주교에게 물건을 매매하지도 말고 매매 계약도 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성 프란치스꼬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이 말을 듣고 몹시 침통해 하였으며 더구나 그들을 화해시켜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 한층 침통해 하였다. 그는 자기 동료들 보고 ‘주교님과 시장님이 서로 미워하고 아무도  그들 사이에 개입하여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으니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겐 큰 수치입니다’”(완덕의 거울 101).

그리고는 즉시 피조물의 찬가에 다음 구절을 덧붙였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미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태양의 노래 10-11).
그 다음 동료 한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시장에게 가시오. 그리고 이 도시의 귀족들과 그들이 모을 수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주교관으로 가도록 전달하시오.” 두 사람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다. 그는 이미 이러한 방법은 양자로 하여금 자기 주장을 더 내세우게 하는 데 밖에는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용서와 하느님 찬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 형제가 떠나자 프란치스꼬는 다른 두 형제에게 주교관에 가서 피조물의 찬가를 부르도록 하였다.
마침내 주교관에 모였던 사람들이 큰 감동 속에 형제들이 노래하는 피조물의 찬가, 특히 마지막 덧붙여진 부분을 듣고 있을 때 갑자기 시장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고 시장은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맹세코 말합니다만, 나는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했던 주교님을 용서합니다.” 그리고는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종인 프란치스꼬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당신이 바라는 어떠한 보속이든지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교는 일어나 시장에게 “내 직책은 나에게 겸손을 요구하지만, 천성적으로 나는 성을 잘 냅니다. 용서해 주시오”하고 말하였다. 그 다음 두 사람은 부드럽고 화기애애하게 서로 깊이 포옹하였다(완덕의 거울 101; LP 84(발자취 44) 참조).
프란치스꼬에게 있어, 수도자이건 평신도이건 누구를 막론하고 그들 사이에 개입하여 평화를 종용하고 화목케 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수치였다. 수많은 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생의 마지막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프란치스꼬는 당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제자들의 그러한 무관심을 꾸짖었다. 이는 당대의 사람들 사이의 화목과 평화를 위한 프란치스꼬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가 행한 이러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행위들과 이상은 오늘날 그의 제자들인 우리가 매일의 사도직 안에서 세상에 전해야 한다.
사료들에 의해 전해지는 프란치스꼬가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이야기들에 어느 정도 과장이 있고 흥분된 어조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평화의 이상은 13 세기와 그 이후에 새로운 평화 운동을 태동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