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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이름값을 하자!

by 大建 2011. 12. 23.
대림 제4 주간 금요일(루까  1,57-66)

방귀녀, 고추양, 가득염, 조금용, 허억 등... 우리가 저런 이름이 실제 있을까 하고 의심할만한 이름들도 참 많이 있는 것 같다.
 

요즈음도 그런 모양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친구들을 많이 놀리기도 하였고, 나 역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법적으로 개명이 가능하게 된 때부터 개명 신청을 하고 실제로 바꾼 이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 중에도 아예 작명소에 가서 운세까지 보면서 작명을 하는 이도 있다고 하니 이름이 중요하긴 한 것 같은데 그런 신자들을 보면 정말 안스럽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부모들과 친척들은 요한이라는 이름 때문에 실랑이를 벌인다.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알려준 이름이 요한인데(루까 1,13), 친척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반대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우리 나라 사람 이름을 짓는데 항렬이 중요시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가문의 어떤 이름을 따랐느냐가 중요시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문에 없던 이름 "요한"이라는 이름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요한이란 말은 히브리어인 ‘요하난’이란 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말의 뜻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이다. 따라서, 천사는 세례자 요한이 전존재로써 하느님께서 은혜로우신 분임을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이웃과 친척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 때문에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는 것을 반대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사실 요한은 전통과 관습을 깨고 광야에 나가 살면서 메시아의 내림(來臨)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 그리고 그 준비로써의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은혜로운 분이심을 선포하는 삶을 살다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정의를 위하여 순교까지 하였다. 


그러나 요한의 이웃과 친척들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은 그러한 은혜로운 하느님의 강생을 율법과 관습에 얽매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를 빚게 되지 않았는가!

우리 말에도 "사람은 이름대로 살게 된다" 고 한다. 이름 값을 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 외에도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즉, 세례명, 소위 본명이 그것이다. 세례성사는 원래 하느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한 상징성을 살리기 위하여 주보성인을 본받아 살도록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이름 값에 걸맞게 주보성인의 삶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전통과 관습, 또는 세례받기 전의 옛 삶에 따라 은혜로우신 하느님과는 관계없는 그래서 변화도 없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 
깊이 반성해보면서 강생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자! 

                                                         (16S)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것들과 미물이라고 부르는 곤충도 고유한 이름을 다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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