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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뻔뻔한 시대

by 大建 2014. 3. 29.

사순 제3 주간 토요일(루까 18,9-14)

"뻔뻔스럽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 의하면 "(사람이나 그 언행이)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이 이 단어에 아주 잘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윤리가 무너져 버린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돈을 벌 줄 아는 누군가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착각이었다. 경제적 어려움,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해서였는데, 대중들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혔다. 이런 착각 속, 대중들은 이명박의 허점에도 억지로 눈을 감았다. 덕분에 이명박 체제는 이를 동력으로 삼았다. 뻔뻔함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첫 장관 임명 때부터 후보자의 범죄경력 등을 무시하고 임명을 강행했다."(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양학부 교수,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그러나 사실, 우리 나라에서 뻔뻔함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박정희, 이승만의 시대까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바리사이는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뻔뻔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들어높인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이와 비슷하게 "아예 양심이나 예의를 모르고 제목소리만 내는 이들, 자기 몫만 차지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뻔뻔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이 착하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 뻔뻔할 용기나 능력이 없음에 자괴감을 느끼게 된" 그러한 시대가 된 것이다. 

 



바리사이에게 세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존재, 죄인이기에 상종할 필요도 없는 존재였기에 그런 사람 앞에서라면 뻔뻔함을 마음대로 드러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품어주셨고, 그들의 기를 세워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요, 그렇게 해야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신다.

"있어도 보이지 않기에 ‘한 줌도 안 된다’고 간주되는 ‘소소한 무리들’, 있어도 제대로 세어지지 않기에 ‘한 줌’밖에 안 된다고 간주되는 ‘보잘것없는’ 것들, 그래서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소수자’로 간주되는 것들. 그들을 보이게 만들고 그들을 제대로 세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한 줌의 정치’다"(이진경, 같은 책, p.6)

우리가 바리사이의 뻔뻔함, 이 사회의 가진 자들의 뻔뻔함을 넘어설 때, 그리고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낮추며, 작은 자들,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자들끼리 서로 서로 품어주려 할 때 이 땅에서 비로소 바리사이와 같은 뻔뻔한 자들이 없는 자 취급하는 바로 그 하느님의 다스림, "한 줌의 정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이 그토록 바라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40SI4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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