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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by 大建 2017. 4. 3.

사순 제5 주간 월요일(요한 8,1-11)


신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과거의 죄에 대하여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죄에 대하여 고백성사를 보았음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개인의 심성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하느님을 엄중한 재판관으로만 생각할 때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난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적이지도 않으며 하느님은 매몰차게 죄에 대한 책임-벌을 엄중히 묻는 그러한 재판관이 아니시다. 다만 죄를 짓고 떨고 있는 우리를 보고 안타까워 하시며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즉 인간이 흔히 다른 인간에게 하듯이 과거의 죄, 잘못을 붙들고 늘어지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앞으로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시는 말씀은 조건으로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와는 관계되지 않는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도록 인도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재판관"이 아니시라 "사랑"이시다(1요한 4,17). 그렇기에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하자. 그분의 자비하심,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는 죄의 추함을 멀리 하고 새로운 생명,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가득한 생명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죄의식으로부터 출발할 때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 대해서 엄한 재판관으로서만 인식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