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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겸손한 요한

by 大建 2015. 1. 10.

주님 공현 후 토요일(요한 3,22-30)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의 제자들의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자리하고 있다. 스승이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시라면 요한보다 못하신 분인데, 어떻게 스승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냐는 것이다. 그들의 자존심과 교만은 시기와 질투를 만들어서 귀와 눈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제자들은 스승 요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또한 세상 안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드러내고자 하며 남을 깍아내리고, 내가 올라서고자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누른다.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시기와 질투로 마음이 이글거린다. 이러한 삶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서실 여지가 없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아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아간다.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봉사를 하면, 봉사를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보다는 생색내기 일수이다.

모름지기 신앙인은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내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수가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나야 함을, 물러날 때를 알았던 사람이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겸손되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를 원한다. 참으로 겸손한 인물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내용이 아닌가 싶다. 

모든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사람은 그분께 겸손되이 용서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겸손되이 뉘우치면 아무리 많은 죄라도,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타인이 잘못했을 때, 그를 용서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미움을 담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참 심판관이신 하느님, 용서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도외시 하고, 오히려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키우고 하느님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사도는 "형제가 죄를 지을 때" 그를 위해서 용서의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작아지고 그분이 커지시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발견으로 크게 유명해진 다음에도 대자연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과  지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다음, 실험기구에 있던 물에 손가락을 적신 뒤 한 방울의 물을 톡 떨어뜨리며 말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겸손은 우리 신앙의 기본이요, 바탕이다. 겸손하게 살아갈 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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