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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두려움을 넘어서

by 大建 2015. 9. 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22 주간 목요일, 루까 5,1-11)


나는 신앙 생활 초심자 시절에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 등을 생각하면 과연 누가 그분 곁에 머물러 기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멀리서 대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시기에 말이다. 그토록 하느님은 지존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은 그렇게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시지만은 아닌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에게 어떤 열정을 가지고 다가오시는지를 안다면 그 누구도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배드로는 낯선 분이 다가와서 어부인 자신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시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말씀드린다. 이렇게 두려운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 베드로를 매혹하시고 당신의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매혹하시는 분이시기도 함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러한 사실을 "Deus tremendus et fascinans(하느님은 지엄하시며 동시에 황홀하신 분)"라고 잘 표현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미신과 같은 다른 종교가 믿는 절대자, 신(神)의 차이점이다. 미신의 대상은 다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요 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을 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여기에서 그치는 분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아시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채우시기 위해 다정히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즉 우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바꿔 말하면 당신의 완전성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가 당신을 맞아들이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를 매혹하시는 것이다.


두려움을 넘어서기로 하자. 우리를 매혹하시며 다가오시는 분에게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도록 하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망을 얻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집회 10,21)  그분은 우리를 성숙시켜 주시며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당신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5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