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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사랑 때문에

by 大建 2017. 6. 27.

연중 제12 주간 화요일(마테 7,6.12-14)


눈높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아이들의 이해 정도를 파악하고 그 수준으로 내려가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으로 요즈음은 비교적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비단 아이들 교육에서 뿐이랴. 사랑도 눈높이로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랑이 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아내는 "삐딱구두"를 신고 싶어하는데 남편은 그저 "나막신"이면 되겠거니 하고 나막신을 사준다면 그것은 아내에게 선물을 하고도 욕먹을 짓을 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나는 멋진 가방이 가지고 싶은데 아내는 나에게 "망태기" 하나 사준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물론 상대방이 바라는대로 해주는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면 아내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남편은 일 주일 내내 자기 곁에 붙어서 꼼짝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속박하는 것이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내가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아내에게도 합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때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그것이 악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라면) 해주는 것이다. 나역시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듯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 뜻을 희생하거나 적어도 양보하고 상대방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나를 내세우지 않고 그야말로 "배알"도 내어주면서 살기에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고 그래서 자연스레 희생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하였을 때나, 이미 결혼한 부부들 같이 이미 서로를 차지하였기에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느끼는 관계에서는 나를 낮추고 비우면서 사랑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면, 그리고 사랑만이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라면 우리는 쉽지 않지만 "기를 쓰고, 애를 쓰면서" 나의 것을 없이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주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하고 말씀하시는 까닭이다. 


이웃을 위한 사랑이거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거나 원리는 같은 것이다. 우리가 "주님, 주님" 하면서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참되고 영원한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면 우리는 "기를 쓰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