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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어떠한 평화를 구하고 있는지

by 大建 2010. 5. 13.

부활 제5 주간 화요일(요한 14,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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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 대해서 말할 때 누구나  "평화의 사도"라는 호칭을 떠올린다.
그만큼 그는 일생을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든지 설교를 시작할 때는 먼저  주님의 평화의 인사를 전하였고,
남긴  글 곳곳에서 얼마나 평화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지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화가 있는 여러 곳에 뛰어들어서 평화를 일구어냈다.
심지어는 십자군 전장(戰場)에서 바보 취급을 받으면서도
양측에 종전(終戰)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러한 성인이었지만, 그 역시 한계를  지닌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수도회가  설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수도회는 성인이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많이 배운 형제들이 영적인 이상(理想) 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법적 조직 체계를 강조하자
수도회 안에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수도회의  창설자인 프란치스꼬 역시 심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형제들의 단순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지독한 영적 어두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 어두움의 끝에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는다.
성인은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비록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일이었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의탁해야 함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참 평화를 체험하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아씨시의 주교와 시장이 불목하자 
그 화해를 위하여 "피조물의 찬가" 후반부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내가 지니고 있음, 더 가짐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의탁할 때 가능한 것이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길 - 수난의 길을 가신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요한 14,31).
우리는 과연 어떠한 평화를 구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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