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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과부의 헌금

by 大建 2009. 6. 6.

연중 제9 주간 토요일(마르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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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봉성체를 다니다 보면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이신데,
또 대부분, 가난하신 분들이다.
자녀들이 그럭저럭 살만하거나 같이 살거나 하면 치료도 제대로 받고 또 성당에 모셔 오기 때문에
봉성체가 필요없는 경우가 많다.
즉 대부분 봉성체의 경우는 가난하고 자녀의 도움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인들이 대개는 봉성체가 끝나고 나올 무렵에 봉투 하나를 건네주신다.
송구스럽게 신부님이 와주셨으니 감사 헌금으로 받아두라는 것이다.
사양하면 막무가내로 미사 예물로 처리해 달라고 하신다.
한푼이 아쉬운 그분들의 사정을 알기에 덥썩 받아들이기가 난감한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오늘의 복음 말씀(과부의 헌금)이었다.

이렇게 없는 이들이 더 관대한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일 미사 헌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먼저 이 글은 진정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송구한 마음을 지니고 헌금을 하는
가난한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글이 아님을 밝혀두며,
오히려 그들의 아픔을 하느님께서 위로해 주시리라 믿는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 오기전, 주일 미사의 헌금은 대체적으로 1000원 짜리 지폐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러한 사정이 2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대부분의 본당에서 그 사정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의 신자는 주일 헌금을 미사 입장료나,
받아 먹는 밀떡 값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아닐까?

성직자들이 보기 싫어서, 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성당에 헌금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본당이 아닌 가난한 이들, 어려운 이들을 위한 복지 시설을 위한 후원회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변의 그러한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봉헌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역시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문제는 내 것을 내어놓지 못하는 우리의 인색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찌들어 살다보니
나에게 반대급부가 즉시 가시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헌금을 하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든 내 것을 내어놓는 것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인데,
하느님과 "거래"하려는 자세가 은연 중에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였기에,
즉 그분께서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시며,
그분만 계시다면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았기에
자기의 하루살이 수입을 모두 바쳐드릴 수 있었다.

그 시대나 이 시대나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내가 지닌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관대한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