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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by 大建 2011. 7. 13.

연중 제14 주간 금요일(마테10,16-23)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에 대해 예고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증오를 받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무엇인가는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단어는 sanctus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자주 ‘성도’(聖徒) 혹은 ‘성인’(聖人)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의 표준적인 의미는 ‘거룩하다’이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의미, 어근적인 의미는 ‘다르다’이다. 거룩한 것은 다른 사물과 무엇인가 상이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에서 그리고 그후 한국과 세계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또 순교를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수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표현된 그러한 다름은 믿지 않는 이들의 생활 양식을 말없이 비판하며 심판하는 것이었다.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무조건 단죄하며 실망하여 살거나 또는 그 때문에 목숨을 그저 버렸던 것이 아니다. 또는 의식적으로 자기들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우월감을 느끼며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에 따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자 하였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현대에는 박해가 순교 시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체면을 내세워서,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서, 그리고 여러 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게끔 유인하는 요인들을 통해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기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과, 세상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해보고 그에 대한 은총을 구하자.


박해를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한다.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과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며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것이다(1 베드 2,21-24). 신앙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다(1 베드 4,13-16). “만약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로마 8,17).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그분의 위로도 같이 받을 것이다”(2 고린 1,7).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2 디모 2,12).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치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고난에의 참여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의 참여를 포함하는 것이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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