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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보다 작은 자"로서

by 大建 2012. 2. 21.

연중 제7 주간 화요일(마르 9,30-37)

무한 경쟁을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인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복음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다. 경쟁은 이기고자 하는 것이고, 재물에 있어서나 지위에 있어서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계속 밀려나는 비인간적인 체제가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분상승과 재물의 취득이 최고의 가치를 형성하는 오늘날에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재물과 학식, 명예와 신분이 인격보다 더 중요시 되고,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게 하는 저 비인간적인 사조들, 물신주의, 황금만능주의적 사조, 그리고 후근대주의(모든 가치관을 무효화시키는)적 사조를 우선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선(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있는 분이시며, 세상 만물의 상대적 가치에 비해 그분의 절대적 가치에 승복하고, 그분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된 인간은 천부적인 인권을 누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오늘의 복음의 메시지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나”와 더불어 “너”가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상기할 때 우리는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이웃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이웃보다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전혀 우리의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것임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다.


13세기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작음”의 개념“으로 교회 안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과 특권과 지위에 대한 추구와의 절연이었다. 그것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들, 곧 성경이 말하는 "아나윔(anawim,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욕망이었다. 그것은 봉사하려는 욕망이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나누며, 서로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자가 되려는 욕망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욕망, 즉 인간의 가장 악한 경향을 극복하려는 욕망이다. “작게”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위보다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더욱 직접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도, 한없이 작고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이웃보다 “더 작은 자”로서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자. 작은 자가 되는 길이 곧 비할 수 없이 위대하신 하느님을 닮는 길이다.

                                                                                                                                                  (2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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