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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흑백 논리

by 大建 2012. 7. 31.

연중 제17 주간 화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마테 13,36-43)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누가 정의이고, 누가 불의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악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흑백 논리가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선은 한계가 있어서 100% 선할 수가 없고, 인간의 악 또한 한계가 있어서 100% 악할 수가 없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그렇다.
그러므로 죄인 속에 의로움이 있을 수 있고 의인 속에 죄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선행 속에 악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사악하고 잔인한 악인이라고 해도 그 속에 가엾게 여길 만한 안타까운 점이 있기 마련이다.
알곡의 뿌리와 가라지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 따라서 가라지의 뿌리만 쏙 뽑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선과 악의 뿌리가 뒤얽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도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에 반대하셨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함께 뽑을까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은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구분하여 따졌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결코 내치지 않으시면서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신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다름을 가르쳐 주신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한없이 너그러우신 하느님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우리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인간적인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잘못된 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고 내치는데 성급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면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내 뜻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하느님께서 정의의 집행을 미루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내 안의 가라지를 먼저 가려내고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그것이 제거될 수 있도록 청하면서 기다릴 때,  내가 가라지 투성이로만 바라보는 나의 이웃 안에서도 좋은 알곡을 발견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내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나의 시선도 정화되는 것이다.

바로 나 자신 안에 흑과 백이 공존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내로이 기다리자.

                                                                                                                                                            (2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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