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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숨어 계신 아버지

by 大建 2014. 6. 18.

 

연중 제11 주간 수요일(마테 6,1-6.16-18)

 

1.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으로부터 연말 정산에 필요한 영수증을 꼭 발행해주는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싶다는 제의가 수도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신자분에게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또한 조금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한푼이라도 아끼고 되돌려받는 방법을 찾는 세속의 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것이 조건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 것이다.

2. 그런가 하면 거액을 기부하면서 전혀 흔적조차 남기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매년 성탄 무렵이면 그런 사람들이 꼭 나타나는데, 작년 성탄 무렵에도 익명의 60대 신사가 거의 7000만원에 이르는 거액을 기부하고 사라졌다고 한다(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771692&ref=H).

또한 최근에 미국에서는 헤지펀드 출신 직장 동료 3명이 1990년대부터 모두 130억 달러(약 13조3천억원)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인권신장과 환경보호, 질병퇴치 부문 등에 익명으로 기부해온 사실이 국세청 자료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세 사람중의 한명인 겔바움은 지난 2004년 에 "많은 돈을 갖고 있고 또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해서 굳이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5/09/0619000000AKR20140509154400009.HTML).

3. 오늘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단식, 기도, 자선행위는 유다인들이 중시한 "신심 행위"들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신심 행위를 내면화시키신다. 사람들이 자선, 기도, 단식 등을 행하는 것은 다른 이들 앞에 스스로 의로운 존재로 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가지 신심 행위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내면화되지 않으면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 18절에서 말씀하시듯이, "숨어계시는 아버지, 숨어계시는 하느님(Deus Absconditus)"(18)과 관계를 맺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시는 곳 없이 계시는 분이시지만, 불완전한 우리 눈에는 "아니 계시는 듯", "숨어 계시는 듯" 여겨지는 분이시다.

이렇듯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숨고 나 자신으로부터 숨어야만 한다.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멀리 해야 그분과 하나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럴 때에야 우리는 숨어계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려는 마음, 자랑하는 마음으로 "회당과 거리에서", 즉 세상에 드러내면서 자선, 기도, 단식을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의로운 일들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것이고 하느님은 다시 우리로부터 숨으시게 되니 관계가 불가능하게 된다.

세상 일에 쫒기며 바쁘게만 살아왔던, 그래서 하느님과 깊고 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숨어계시는 하느님"을 좇아 우리도 숨어 지내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내적 행복을 충만히 누리도록 하자. 우리 스스로 숨어지내고, 그렇게 숨어서 단식, 기도, 자선을 할 때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밝히 드러날 수 있다!

 

                                                                                                                                                                                 ( 4578J1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