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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청맹과니 이야기

by 大建 2016. 5. 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연중 제8 주간 목요일, 마르 10,46ㄴ-52)


오늘 복음은 맹인이었던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주지만, 사실은 세상의 수많은 청맹과니들에게로 향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청맹과니라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본디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혹은 그런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사리에 밝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기도 하다(cf.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7358400).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많은 이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나뵈옵는데 바르티매오가 방해가 된다고 여겼거나,  혹은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께 눈먼 거지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어딜..."이라는 마음으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은 이들"은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처한 현실과 그로 인해 당하는 고통, 그리고 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바르티매오가 사고나 병으로 인한 후천적인 실명으로 처하게 된 비참한 현실, 그래서 다시 보기를, 다시 빛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이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었다. 혹시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나뵈옵는데 바르티매오가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면,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웃의 불행을 또 한번 짓밟는 꼴인 것이니, 그러한 부류의 인간들을 지극히 싫어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고, 또는 "눈먼 거지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어딜..."이라는 마음으로 바르티매오를 막아섰다면,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복음이야기는 이 시대의 수많은 청맹과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나 안방의 세월호 사건이라고 불리는 가습기 세척제 사건 등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고 비통한 마음으로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부르짖는 이들에게 온갖 험한 말을 퍼 부으며 "그만 잊자, 왜 아직도?" 하고 떠드는 이들, 특히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도 볼 줄 모르고, 그렇게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연대하는 이들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테 10,10) 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락없는 청맹과니들이기 때문이다.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지만, 아마도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한번도 제대로 바라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이제  오히려 "다시" 라는 말을 빼고,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겸손되이 청을 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뱀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의 이 대목에 대해 해설할 때 "'영적' 청맹과니,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적"이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그 수식어가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