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오늘과 내일의 부활

by 大建 2016. 7. 28.

성녀 마르타 기념일(요한 11,19-27)


오늘은 한 주간 전에 축일을 지냈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언니인 성녀 마르타 기념일이다.

동생은 축일로 지내고, 언니는 기념일로 그것도 동생보다 뒤에 기념을 하고 있는데, 공연히 교회 탓에 성녀들끼리 싸움이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 나라에서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


당신께서 사랑하던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주님께서 들으셨지만 라자로가 죽은 후에나 그 집을 방문하셨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왔고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 여기서도 두 자매의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다. 적극적인 마르타와 소극적인 마리아, 외향적인 언니와 내향적인 동생...

 

그런데 마르타가 예수님을 마중나온 것은 기쁘게 환영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만, 불평을 터뜨리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 빨리 오시면 오빠의 죽음을 막아 주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했지만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드러낸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 오빠는 살아 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당장 무덤에서 살아 날 것이라는 뜻이지만 마르타는 단순히 마지막 때의 부활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타는 주님을 생명을 주시는 메시아로 고백한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라자로를 부르며 그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신다.


오라버니의 죽음에 슬퍼하고, 빨리 오셔서 그의 죽음을 막아주지 않으신 예수님께 섭섭함을 드러내는 마르타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우리도 마르타처럼 인간적인 감정을 없이하고 살 수 없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지금 당장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주님께서는 미래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지금, 현세의 우리 삶에서도 부활을 주시는 분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죄와 유혹을 물리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부활하게- 하심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 안에 부활시켜 주시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며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로 하자. 













'믿음 희망 사랑 > 강론,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장부 성녀 클라라  (2) 2016.08.11
길잃은 목자?  (0) 2016.08.09
"사도들을 위한 사도"  (0) 2016.07.22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0) 2016.07.21
끝까지? 언제까지?  (2) 201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