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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용서, 믿음의 행위

by 大建 2017. 8. 17.

연중 제19 주간 목요일(마테 18,21─19,1)


어느 유명한 랍비는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 번 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 것이요. 용서하는 자는 네 번째에는 용서해 주지 말 것이라.”라고 말하였고 한다. 그는 이런 원칙을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하느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이방 도시들에게 세 번 경고 하신 후, 네 번째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셨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교의 가르침은 이런 식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 랍비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에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78번째에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잠언 24,16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다. 이 뜻은 여덟 번째에는 못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의인은 여덟 번째에도, 일흔일곱 번째에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 넘어졌다고, 실패했다고, 버림받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내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일곱 번만 용서하셨다면 그리고 그 후에는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 여기 앉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은 나를 일흔 일곱 번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용서해 주셨고, 나를 일흔 일곱 번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일으켜 주셨다.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스스로 낙심하지 말자. 스스로 절망하지 말자. 하느님의 굳건한 약속을 붙잡고 일흔일곱 번 일어나기로 하자.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우리도 서로를 일흔일곱 번이라도, 사실상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믿음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나를 무한히 용서해 주셨고 앞으로도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용서다.

                                                                                                                                                               (70S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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