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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천박한 삶과 고귀한 삶

by 大建 2017. 8. 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마르 6,17-29)


유유상종, 즉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헤로데와 그 가족은 정말로 그렇게 한결같이 천박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헤로데, 그는 임금으로서 잔치에서 술 기운에 함부로 약속을 하고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자기가 존경하고 또한 두려워하는 예언자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헤로디아의 딸은 공주는 아니지만 왕의 수양녀의 신분으로서 잔치상에서 춤을 추어 손님들의 흥을 돋군다.

그 에미 헤로디아는 자기가 앙심을 품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원함으로써 헤로데의 생일 잔치상을 피로 물들이고, 흥겨운 자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다.


이들은 지엄하신 하느님을 두려워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진정 인륜을 저버린 사람들이고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들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권력과 재물에만 집중하는 삻을 살아가는 인간들이었기에 복음의 이야기와 같은 비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내었다.

그러니 유다 민중의 삶은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정말로 황당한 죽음을 맞이한 세례자 요한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자세로서 살아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마테 3,1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8. 30)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떤 인물이 되겠다고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 메시아를 위해 자신과 자신이 지닌 것의 가치는 초개와 같이 여겨 희생시키는 고귀한 삶을 살아갔다.  그래서 비록 황망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는 세기를 통하여 하느님을 흠숭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경받는 위인이 되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천박하기 짝이 없게 세상 것들에만 집착함으로써 나 자신과 이웃을 피폐하게 만들고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는 삶인가, 아니면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하여 희생하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을 삶으로써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인가?


선택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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