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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강인한 여인 마리아

by 大建 2017. 9. 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요한 19,25-27)

 

어제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보통 이야기하기를 십자가 형틀 위에서 사람이 죽는 데는 개인 차는 있겠지만 두 세 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못박힌 자리로 계속 피가 흘러나오게 되고 결국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요한 19,31에 의하면,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낮에 집행된 사형이 저녁 무렵까지 마무리되지 않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데 꽤 시간이 지체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등이 서 있었다"고 전한다. 

정말 마리아는 대단한 여인이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사실 평온한 마음으로 서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흐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통곡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고 서 계셨다. 

"여인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만, 아무리 강한 어머니일지라도 자기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서 있을 여인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대개는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기 전에 혼절해버리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서 있을 정도의 성모님의 강인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두 말 할 나위없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신앙,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서로 작용시켜서 좋은 결과를 이루신다"는 신앙이 마리아를 그토록 강인한 어머니, 그토록 강인한 여인이 되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는 유다교 율법에 의하면 돌맞아 죽을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고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받아들여 잉태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고난, 수난의 현장에 함께 하셨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 고통이 주어지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전체적으로 우리 인간이 고통을 통해서,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신앙을 지닌 이에게는 고통은 그 자체로 의미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요, 그분의 일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단말마의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하느님의 일"을 마무리하시려는 예수님 곁에 성모님처럼, 성모님과 더불어 서있기로 하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통, 그 희생을 기억하기로 하자. 그리고 성모님께서 그야말로 초지일관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배를 "믿으며"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삶에 함께 했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을 성모님과 함께 묵묵히 따라가기로 하자. 끝내 성모님을 당신 영광에 불러올리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작은 정성도 받아주시고 같은 영광을 허락하시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말이다. 

                                                                                                                                       (71Ic3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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