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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6

by 大建 2008.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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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적 생활의 일치와 평화

프란치스꼬 성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삶 안에 평화의 체험을 지니지 못하고는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없다. “영혼의 참된 평화”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온전히 화해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태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프란치스꼬는 다음과 같이 자기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말로 전하는 평화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능한 한 가득히 간직하기 바랍니다”(세 동료 58).

참된 평화는 주님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태동한다. 각 사람이 내적으로 일치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응답하는 그만큼 화해와 평화를 위한 더 좋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내적 쇄신에 대하여, 프란치스꼬는 평화의 교육학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1221년의 회칙 17장에서, 모든 형제들에게 복음 선포의 책임이 주어졌음을 느끼게 한 다음 프란치스꼬는 모든 형제들이 복음을 생활로써 선포해야 함을 강조한다: “모든 형제들은 행동으로 설교할 것입니다”(3절)., “하느님이신 사랑”의 빛으로, 내적 생활의 일치가 평화를 위한 근본 조건임을 6-16절에서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프란치스꼬가 “영혼의 평화”에 세 가지 속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겸손과 인내,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1 회칙 17,14-15).
  
이 세 가지 표현은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각각 깊은 의미가 있는 용어들이다.
먼저, 프란치스꼬가 “순수하다”는 말로써 이해하는 바는 권고 16에 명백히 나타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테 5,8).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심원한 말로써 순수함의 본질을 부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잘 묘사하고 있다. 순수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모든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내적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유지하기 위해 지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극복해야 한다. 순수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 반대되는 모든 경향과 거리를 두고 은총의 역사에 온전히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순수하다는 것은, 프란치스꼬의 표현에 따르면, “천상적인 것을 찾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기비움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된 순수함은 하나의 덕(德)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필수조건인 순응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성”은 프란치스꼬가 가장 찬양하는 덕들 중의 하나이다.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은 이 세상의 지혜와 육의 지혜를 부끄럽게 합니다”(덕행 인사 10).

프란치스꼬는 단순성이 무엇인가 정의하지는 않고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이 아닌 것을 강조한다. 즉 악습과 죄로 물든 세상의 지혜는 단순성과 반대되는 것이다. 단순성은 인간을 하느님께 향한 길에서 예속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며 인간을 내적 생활의 일치로 이끈다.

“참된”이란 형용사는 프란치스꼬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참된 평화” 이외에도 “참된 기쁨” 참되고 완전한 기쁨, “참된 순종”(1 회칙 5,17; 권고 3,4),그리고 “참된 신앙과 회개”(1 회칙 23,7) 등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는 이 형용사가 프란치스꼬의 사상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형용사의 의미는 프란치스꼬가 매우 특별하게 모방한 요한 복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신적 진리인 그리스도를 따른 진지한, 진정한, 영속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이란 표현은 단순히 외적이고 표면적인 안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성령의 선물인 어떤 깊은 정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육이 마음쓰는 바는 곧 죽음이요 영이 마음쓰는 바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6). 같은 의미를 우리는 갈라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영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설교자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가 얻은 결과에 대해서 자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1 회칙 17,4-8).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선물인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인준받지 않은 회칙의 17장을 마치면서 프란치스꼬는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삼위일체적 생활의 내밀한 체험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은)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1 회칙 17,16).

제1 회칙 17장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를 T.마뚜라는 다음과 같이 깊이 있게 해석한다.
“두려움은 경외심이며,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배의 의미이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무엇인가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의식(意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혼의 참된 평화”는 프란치스꼬의 사상  안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그 가장 심원한 근원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즉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있음을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은 이미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생생한 연결고리이시며, 인간에 대하여 애덕과 일치를 통한 성덕에로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분,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느님이신 사랑”의 이끄심에 내어 맡기는 사람은 내적 생활의 일치를 실현시킬 수 있으며 “영혼의 참된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일치와 평화로 이끄는 것은 항상 성령에 의해 충만된 사랑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의 부재는 언제나 “영혼의 참된 평화”를 얻음에 있어서 장애물이 될 것이다. “하느님이신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가장 내밀하게 자기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만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 하느님과, 인간들과, 자연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제 우리는 프란치스꼬의 글 중에서 또 다른 문맥, 권고 15 에서 동일한 메시지의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평화로운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테 5,9 참조). 진정 평화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꼬는 거의 비슷하게 성서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옮겨 적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eirenopoios)”이라는 말을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마테오 복음사가가 평화를 건설하는 데 협력하는 이들의 선교적이고 역동적인 측면을 강조함에 비해, 프란치스꼬는 내적 평화를 고집하는 것이다. 곧 이어 나타나는 프란치스꼬의 해설(2절)에서도 몸과 마음, 즉 인간 존재 전체의 평형과 일치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다.
프란치스꼬에 따르면,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평화에 의해 차지되도록 하여야 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저 특별한 방법, 고통과 삶의 역경들로써 내적으로 평화를 사랑하여야만 한다.
권고 13에서, 마테오 복음에 따른 동일한 행복을 해설하면서도 프란치스꼬는 이러한 내적 평화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종은 일이 뜻대로 잘 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할 때 그가 보여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프란치스꼬는 악에 대한 무관심과 같은 금욕주의적 태도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들을 위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고통의 빠스카적 신비를 이해하고 살아낼 수 있는, 신앙에 근거한 심오한 내적 고요함과 우리의 모든 내적 힘의 집중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를 위하여 사용된 모든 노력은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어야 한다.
평화와 내적 일치에 대하여 프란치스꼬가 선포한 가장 감동적인 표현을 우리는 용서와 고통과 평화에 대하여 읊은 “피조물의 찬가” 마지막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태양의 노래 10-11).

태양의 노래의 이 연들은,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듯이, 아씨시의 주교와 시장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몇몇 형제들을 통하여 프란치스꼬가 개입한 사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그들을 화해의 협정 테이블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평화의 재발견을 위한 선의의 제스츄어를 그들에게 청했다. 미움과 복수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의 내적 관대함에 호소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평화의 복을 소생시켰다. 아씨시의 주교와 시장간의 화해는,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는 평화와 불화가 영적 세계와 어떻게 긴밀한 관련을 갖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독특한 경우들 중의 하나이다.
프란치스꼬는 또한 성녀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에게 보낸 노래 형식의 권고에서도 계속하여 평화를 위한 길로서의 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병고에 시달리는 자매들과 이들을 돌보느라 애쓰는 자매들은 똑같이 평화 안에서 인내하십시오”(글라라 권고 5).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고통, 인내 그리고 평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 자신의 고통의 체험으로부터, 그는 내적 생활과 평화의 정복에 있어서의 고통의 구속적인 차원을 발견하였다. 고통 안에서의 인내는 근본적으로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권고 6,1)와의 통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감수하셨기에  성부께서는 그분을  영광 안에  받아들이셨던 것이다(수난 성무 6,11-12).
또한 우리는 고통 안에서의 인내와 가난이 프란치스꼬가 죽을 때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것들임을 상기해야 한다(2 생애 216). 인내하는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에 의해 비워지고, 개방된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내는 내적 가난, 자기 존재의 허약함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자신의 가난함과 허약함을 깨닫는 인간만이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가난과 평화는 이러한 점에서 두 개의 상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난하기 때문에 평화를 지닐 수 있는 것이며, 평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가난하지 않은 자는 거짓 평화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자극하며, 적어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얻는다는 구실로라도 부를 쫓아 헤매게 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꼬가 평화를 얻기 위하여 발견한 확실한 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실재가 되도록 하는 길이었으며, 극단적인 내·외적 가난의 길, 아무 것도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아씨시의 가난뱅이가 사물을 보는 방법이었다. 형제들의 물질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소유물이 있어야 한다고 그에게 주장하던, 친구이자 신뢰자였던 아씨시의 주교에게 하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교님, 만일 우리가 어떤 소유물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지킬 무기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갖가지 형태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다툼과 분쟁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세상의 어떤 일시적인 사물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세 동료 35).

언뜻 보기에는 순진하기만 한 성인의 이 대답은 천재적인 직관에 의한 것이다. 모든 종류의 소유는 폭력이라는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무엇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다투게 되며, 무서운 공격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무기에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이 세상이 자기의 소유물들을 지키기 위해서 각각 어떻게 무장하고 있는지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가.
자신의 거룩한 단순성 안에서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형제들을 위해서나 어떠한 소유도 포기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예방하기를 원했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공격자를 거슬러 다투거나 전쟁을 하는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평화의 교란의 제일차적 책임이 자기의 소유를 남과 다투는 이에게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교란들은 갈수록 더 심한 혼란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씨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꼬는 그것을 명백한 사실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형제들이 철저한 가난을 통하여 이웃과의 평화에 봉사하기를 원했다.
바로 이러한 방향에서 인준받지 않은 회칙에 규칙 한 가지를 첨가한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간에, 어떤 장소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고, 또 누구와 싸워서 그것을 지키려 하지도 말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1 회칙 7,13).

그리고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리보또르또에 있는 한 헛간에 형제들과 함께 머물고 있을 때 한 농부가 당나귀를 끌고 들어와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주장하자 즉시 그곳을 떠났다(1 생애 44).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꼬의 글들에서 평화라는 복음적 메시지의 선포에는 하느님과 온전히 화해한 “새로운 인간”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평화는 한번 영구히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인 협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평화로 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나벤뚜라는 “하느님 안에서의 영혼의 여정”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맨 처음에  제일 원리이신 분, 즉 영원한 아버지께,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의 전구와 우리의 길잡이며 사부인 복된 프란치스꼬의 전구와 함께 당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저 평화의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도록 우리의 영혼의 눈을 비추어 주시기를 나는 간구한다. 그 평화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전하셨으며 주셨다. 우리  사부 프란치스꼬는 주님 설교의 반복자였으니, 왜냐 하면 그는 말을 시작할 때나 말을 마칠 때나 평화를 선포하고, 인사할 때마다 평화를 기원하였으며 관상할 때마다 황홀경의 평화를 열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저 예 루살렘의 시민,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주라’고 말하던 저 평화의 사람 다윗을 일컷는다.과 같다. 즉 ‘그는 자기 방을 평화 안에 그리고 자기 거처를 시온에 정하였도다’(시편 75,3)라고 기록되어 있는대로 솔로몬의 왕좌가 평화 위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라핌적 박사”는 평화가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선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각될 수 있는 실재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실재,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실재”(요한 14,27)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존재론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 보나벤뚜라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복음적 체험들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어떤 특징 몇 가지 -사부님이 우선적 과제로 받아들인 평화의 사도직,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하는 인사의 선포, 그리고 사도직 생활과 관상 생활과의 균형과 일치- 를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프란치스꼬는 살아가고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내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는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의 균형과 일치에 대해 염려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1 회칙 7,12; 2 회칙 5,2; 10,7-9; 2 신자 편지 21 등 참조).
평화의 환희에로 이끄는 신비적 조명의 길의 여섯 단계에 대해서 말한 다음, 성 보나벤뚜라는 온전히 평화롭게 된 사람만이 내적 예루살렘에서의 기쁨과 안식을 체험할 수 있으며 거기서 평화의 삶과 선포를 위한 모든 에너지가 태동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평화에 이르게 하는 참된 솔로몬의 왕좌의 여섯 계단과 같은 이러한 여섯 가지 고려를 거쳤다면, 참으로 평화로운 사람은 마치 내적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이미 평화로와진 영혼 안에서 쉬게 된다”.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에릭 도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취된 관상으로 이끄는 평화, 가장 지극한 평화는 지상의 개인과 민족 사이에 영속하는 평화의 전제조건이며 유일하게 확실한 기반이다. 세계의 평화가 온다면 관상을 통해서일 것이다. 우리의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들뜬 사회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균형을 잃고 자신과도 편히 지내지 못한다. ‘행동가들’과 ‘현실적인 사람들’이 너무 중요시되는 반 면 관상은 무시되었다…가치있는 것을 달성하거나 창조하려면 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원인이 있는 병으로 자신을 파멸하고 있다. 치료법은 내적 평화와 관상이다”.

이렇게 볼 때, 평화를 내적으로 살지 않으면 참된 평화의 사도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기 위하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소명을 깊이 느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적 친교를 통한 평화의 내적 체험이 참된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