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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강론, 묵상

자선주일에

by 大建 201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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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은 복음적 삶, 즉 회개하는 삶의 핵심적인 모습이며 이웃 사랑의 핵심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가 3,11) 그리스도 최후의 심판의 절대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자선이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고 핵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선이란 그리스도인에게 부수적이고 특수한 삶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실천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개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선(慈善)'은 '사랑할 자'와 '착할 선'으로 이루어진 참 좋은 단어입니다. '사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는 말이겠죠. 사전적인 의미로의 '자선'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 줌'으로 설명됩니다. 불쌍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로 사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쉽게 생각하면,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면 측은하게 생각되고 그러면 얼른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그게 뭐 그렇게 사랑스럽고 착한 일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자선은 참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세요.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런 생각하면,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모은 돈을 선뜻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준다는 것이 정말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예수님도 '자선'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셨고, 초대교회 때부터도 자선을 중요한 신앙인의 덕목으로 또한 회개의 표지로까지 강조하였을까요?

   어떤 사람이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이 사용하셨던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길에 성문 앞에서 굶주림에 허기진 걸인을 만났습니다. 그 걸인은 그에게 한 끼의 식사를 구걸을 했지만 그는 거들먹거리며 본체만체 지나쳤습니다. 주님의 성배를 찾아나서는 길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심한 고생 탓에 몸에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성배를 찾아 나설 때와는 달리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거들먹거리던 모습도 많이 겸손해 졌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들어설 때, 떠나면서 구걸하던 걸인이 또다시 자기에게 한 끼의 식사를 구걸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전과는 달리 그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빵을 그에게 건네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으로 시원한 생수까지 떠다 주었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손에 들려 있는 그 쪽박이 바로 나의 성배니라."

  주님을 찾아서 평생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결국 지금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나의 이웃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 찾아야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주님을 찾아 만나기도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틀림없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하고 불쌍한 우리 이웃들 속에서 주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 주님도 우리를 외면합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 주님도 우리 교회를 외면할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의 실천을 통해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자선을 행하면서도 우리 안에는 동기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자선은 어쩌다 한 번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시간과 노력과 가진 바를 지속적으로 나누는 것이 자선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순수한 동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됩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숨으라는 것일까요? 아마도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좀 더 편안하고 싶고, 자신의 힘을 더 과시하고 싶은 과도한 욕망으로부터 숨으라는 가르침으로 들려집니다. 보다 순수한 동기로 자선을 행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과거의 어느 순간보다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여러 사회지표들은 그들이 겪는 가난의 모습이 단순히 상대적 빈곤만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의 풍요로움이 모두의 풍요로움인지, 아니면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왜곡 속에 오늘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실은 누구 탓입니까? 하느님 탓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바로 우리들 탓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데 왜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누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가난을 어떻게 하면 해결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서로 조금씩 나누면 됩니다."

  그렇다고 그냥 단순히 적선하는 마음으로 던져지는 한 뭉큼의 돈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는 것을 내게 주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 양심의 진정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받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가난을 함께 나눌 의지를 가지고 주기를 바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회적 가난과 고통, 불평등과 불의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내어놓으신 최선의 해결책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불의를 막을 수 있는 제도나 법규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착한 마음을 품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연중행사가 아니라 정말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전에 주님이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면 그들을 찾는 것이 주님을 찾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대림절에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날들을 만들어 봅시다. 자선을 통해 우리 안에 주님이 태어나실 작은 구유를 마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