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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희망 사랑/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16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4 이전 글 - 2008/02/23 - [믿음 희망 사랑/프란치스꼬]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3 2. 중동에서 1205 년에 프란치스꼬가 프랑스의 기사 브리엔느의 괄떼리오의 편에서 싸우려고 아뿔리아로 향하였을 때 하나의 가설은 아뿔리아의 전투 이후에 그가 아마도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여 떠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가장 큰 꿈 중의 하나였다19) 초기 전기 작가들은 이 점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청년 시절 전체를 통하여 그를 매혹하고 있던 기사가 되려는 이상은 예루살렘 성지 회복에 일조하려는 꿈을 갖게 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한다.. 그 때, 프란치스꼬는 주님께서 후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명, 그리스도교의 서방과 동방의 회교 사이의 평.. 2008. 2. 24.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3 이전 글2008/02/22 - [믿음 희망 사랑/프란치스꼬]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2 II.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꼬 초기의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프란치스꼬의 복음적 성소는 천사들의 모후 성 마리아 성당에서 그가 사도들의 파견에 대한 복음을 들을 때 명확해졌다고 한다.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토마스 첼라노에 의하면 프란치스꼬는 이 복음을 듣는 순간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2008. 2. 23.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2 이전 글 : 2008/02/21 - [믿음 희망 사랑/프란치스꼬]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1 2. 역사 안에서의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영적 체험 2.1. 젊은 몽상가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1182년에 태어났으니, 이 시기는 중상주의가 만개하던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그러한 상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포목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득세를 하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계층 출신인 프란치스꼬의 젊은 시절은 당연히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회오리 바람 속에서 발달하게 된다. 아씨시를 휘어잡고 있던 성채, 봉건 제도의 상징인 로까 마죠레를 시민들이 붕괴시킬 때 그는 16 살이었다. 그리고 아씨시의 시민들이 스스로 선포한 그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주변에 성.. 2008. 2. 22.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1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정신 가난, 작음, 겸손, 형제애 등 프란치스꼬의 여러 가지 정신은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따르는 지표가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정신을 완벽하게 통합하며 또 현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정신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은 평화의 사도라 불리시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현대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성인이 바로 프란치스꼬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6년에 평화를 위한 세계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을 사부님의 도시, 평화의 도시인 아씨시에서 소집하였으며, 또한 1989년 성인의 축일에는 한국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세계 성체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 2008. 2. 21.